남자아이를 키운다는 프레임에 갇힌 엄마들에게 전하는 위로
힘들죠? 남자아이들이 그렇죠...
아들 형제를 키우는 엄마에게 그런 위로는 양날의 칼이다. 어찌 됐건 내 아이를 아들이라는 성별의 프레임 속에 가두는 평가이기에 단호하게 ‘남자애가 뭐요? 우리 애는 그냥 애일뿐인데요?’라고 말해야 한다고 이성은 부르짖지만, 현실에서 나는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네에...’하고 위로를 받는다.
일단 에너지가 넘치는 5세와 8세를 동시에 키우다 보니, 둘을 같이 데리고 밖에 있을 때는 넋이 반쯤 나가 어버버 하면서 쫓아다니는 모양새가 된다. 내 꼬락서니가 그 모양이 되다 보니, 약간 제정신이 아닌 채로 마주치는 학부모들에게 그런 동정표라도 받아야 내가 어리바리한 엄마로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선 나와 내 아이들의 성향을 말하자면, 되게 전형적이다 싶은 모자의 모습이다. 나는 에너지가 부족하고 내향적인,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엄마이고 아들 둘은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식의 외향적으로 보이는 에너지 넘치는 소년들이다. 대체로 ‘얘들아 조용해~’하는 나의 새된 목소리는 그들의 뒤통수에서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공중도덕을 해치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은 어떻게든 막고 싶다 보니 종종 단전에서 올라오는 기운 센 사자후로 아이들을 제압할 때도 있다. 사실은 그런 내가 더 부끄러울 때가 더 많다. 그런 내 모습에 ‘아들 둘 키우다 보니 이래요. 아시잖아요’의 클리셰적인 대사를 치면서 어느샌가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알고 있다. 이러한 성향들은 모두 개인차이고, 어린 시절 내향성을 극복하는 게 큰 짐으로 작용했던 나에게 내 아이들의 적극적인 면모는 그 자체로 사랑스럽고 다행스러운 자질임을. 내가 아는 가장 활동적이고 비글스런 어린이들은 자매들이었고, 각각의 아이들은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성향이 큰 진폭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고유한 성향이라는 것도 때로는 새로이 배운 취향과 친구관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아들이라 그렇다.’라는 말은 실상 에너지가 부족해 아이들을 모든 상황에서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는 나에게 손쉬운 방어구의 하나인 것이다. 아 정말 못된 엄마가 아닌가, 자신의 평판과 아이들의 평판을 야금야금 트레이드해 먹는 엄마라니.
아들 초등학생 돼 봐라. 안 무서운 엄마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
직장에서 종종 나이 든 차장, 부장급의 아빠들에게 듣던 말이었다. 그런 조언해주던 사람들은 매일같이 야근과 회식을 일삼았고, 육아란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옛날 아빠들이었다. “우리 애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 말을 무시할 것 같아?”라고 나는 속으로 흥흥거리면서 그들의 말을 흘려 들었다.
그런데 첫째가 초등학교에 가자,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곧 실감하게 되었다. 학교에 간 첫째에게 풍성한 유혹거리가 쏟아졌다. 바로 놀이시간과 친구들이다. 이전과 달리 놀이와 규칙은 통제되지만, 관계 자체는 간섭당하지 않는 초등학생들, 친구들 간 다채롭게 공유되는 다양한 놀이와 TV, 유튜브에 대한 이슈, 그리고 무엇보다 학교가 끝나고 생기는 길고 긴 자유 시간. 휴직 중에 나는 굳이 학원을 뺑뺑이 돌리지 않고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자 전에 없이 첫째의 떼가 늘기 시작했다. 에너지는 넘치되 뒤끝도 길지 않고, 규칙에 대해서는 꽤 순종적이었던 첫째였기에 나는 그런 변화가 참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아직까지 어린 둘째를 쫓아다녀야 하니, 첫째를 완전히 자유롭게 혼자 둘 수도, 매 순간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갈수록 그만 놀이 시간을 끝내자, 다음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자 하는 제안이 사정이 되도록 길어졌다. 아이는 내 요청을 무시하고, 협상하고, 떼쓰고 길게 길게 거부했다. 결국엔 어느 순간 지치고 화가 나, 내가 왜 설득해야 하지? 하는 기분이 되어 엄포와 협박으로 긴 설득의 막을 내렸다. 점차 설득 시간은 짧아지고 무섭게 소리치거나, 냉정하게 명령했다. 그런 방법으로 아이를 통제하려 들기 시작하면 점점 수위가 세 져야 먹히게 된다. 이전과 같은 톤으로 말하면 아이들은 곧 익숙함이 무서움을 이기게 된다. 그 후엔 좀 더 세게, 무섭게 말해야만 아이들이 고개를 돌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따라나서는 것이다. 그때 다른 집 아빠들의 조언이 떠오르면서 불쾌감이 자라났다.. ‘내가 안 무서워서 말을 안 듣나?’ 확실히 아빠가 단호하게 말하면 수위가 덜해도 말을 듣기는 하는 것 같다. (예전에 아빠가 육아 스트레스로 애들한테 엄청 화냈던 시기가 있어서 그때를 떠올려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든 아빠든 화내고 무섭게 말이 나온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는 지쳤다.’라는 다른 표현이다. 우리 세대의 부모 중에 화를 내는 게 마땅한 훈육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도 안다. 화낸 뒤에 부모의 표정에 드리우는 죄책감과 패배감을. 그러다 보니 십 대의 전형적인 표정이 고작 초등학생 1년 차인 내 아이에게도 생겼다. ‘듣긴 듣는데요, 난 왜 그래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하는 태도와 표정이 뿜 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한때 다정했던, 그러나 더 많이 지쳐 보이는 엄마에게 그 태도를 더욱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그러면 이제 통제의 문제를 넘어서 태도의 문제라는 더욱 고난도의 보스몹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겠다. 그리고 아이의 그 표정에, 태도에 난 점점 더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어느 날 저녁, 건방진 첫째 녀석과 짜증스러운 티키타카를 해대다가 화내기 전 숨을 고르고, 제안을 했다. ‘너도 엄마가 자꾸 화내서 속상하지? 엄마도 너 말하는 태도 때문에 힘들어. 우리 하나씩 교환하자. 엄마가 싫어하는 말투를 하나 고치면, 엄마도 네가 원하는 대로 말투를 고칠게.’ 첫째가 반색을 하면서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엄마는 내가 뭘 고쳤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네가 엄마한테 명령하듯이 내놔. 해 놔. 하는 말투를 부탁으로 고쳤으면 좋겠어.’ ‘알았어. 나는 엄마가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엄마가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정말 전형적인 표현으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난 이 아이에게 무엇 때문에 화를 냈던가. ‘아들이라 엄마를 무시하는 거 아냐? 엄마는 안 무서워서 날 무시하는 거 아냐? 첫째라 자기중심적이어서 태도가 나쁜 거 아냐? 내가 화낸다고 나한테 복수하는 거 아냐?’ 내 아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고민한 게 아니라 남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통념에 기대어 아이를 재단해온 것은 다름 아닌 나 스스로였던 것이다. 잊고 있었던 내 아이는 사랑이 많고, 받은 것보다 갑절의 크기의 애정을 돌려주고, 언제나 포옹과 뽀뽀를 좋아하고, 그저 사랑으로 가득 찬 내 보물이었는데, 내 보물을 남보다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아이는 그저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에 의문이 생겨, 그것을 자꾸 확인하고 싶어 나에게 요구하고 사정을 해보고, 떼를 썼던 것이다. 샤워를 시키느라 아이 몸이 물 투성인 것도 잊고 꼭 껴안고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사랑한다고 매일 말할게. 하루에 10번씩 말해줄게. 엄마는 항상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아들을 키우든, 예민한 아이를 키우든, 아픈 아이를 키우든, 거친 아이를 키우든, 이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내 배움을 공유하고 싶다. 일생 받아본 적 없는 거대하고 끝없는 사랑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준 내 아이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손쉬운 프레임으로 내 아이를 분석하고, 재단하려는 유혹에 지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