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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한 나야 Mar 18. 2020

행운의 여인!

해외 지참대 파견 여군 1호


행운의 여인(La mujer con suerte)

우리말로 옮기고 보니 좀 올드하긴 하지만 칠레 지휘참모대학 동기들 사이에서 내 별명이다. 파견되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그들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아주 마음에 든다.


왜? 하필, 칠레야? 스페인도 아니고? 스페인어를 했으면 스페인을 가야지?

지극히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미주와 유럽 등 잘 사는 나라들은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집단 육군사관학교 외국어학과를 졸업한 뛰어난 남자 군인들이 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은 그들의 것! 당연한 일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사관생도 한 명에게 쏟아붓는 돈이 얼만데...'


어쨌든 육사 출신 엘리트도 아니고 검증도 안된 여군 장교를 굳이 보내어 모험을 걸 이유가 국방부는 없었던 것이다.


국방부는 매년 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 국가에 소령급 장교 2~3명을 파견해야 한다.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등등


이렇게 파견된 그들의 임무는 중남미 중령, 소령들과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고, 논문을 쓰고 동기들과 교류도 해야 되고 할 일 들이 많다. 그리고 훗 날 진급이 되면 국방무관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암튼 이 모든 과정은 스페인어로 이루어진다.


우리 군 대부분 소령급 장교들은 부대에서 대대장 다음 넘버 2로서 가장 일이 많고 바쁜 시기다. 민간인 30대 후반쯤의 과장, 차장급 정도랄까? (잘은 모르겠지만...ㅎㅎ) 이런 시기에 퇴근하고 잠잘 시간도 없는 남자 군인들이 전공도 아닌 스페인어를 몇 명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칠레 선발시험에 지원했을 때는 이미 두 번이나 공고를 했으나 지원자가 없어 세 번째 추가모집을 하고 있었다. 국방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파견을 보내는 것도 국방외교의 한 부분이니, 보낼 사람이 없다고 안 보낼 수 도 없는 노릇이다.


면접장에는 ROTC 출신 남군 소령이 육군본부 연락을 받고 이미 면접에 참가해 있었다. 어제 밤늦도록 대대전술훈련평가를 치르고 전방에서 갓 나온 이 친구!


칠레?

지원동기는 그렇다 치고 문화, 역사, 경제, 국방 등등 하나도 대답을 못한다. 면접관들은 내겐 관심도 없다.


그러나 나도 이미 콜롬비아, 페루 시험에서 다져진 몸! 2번의 낙방 경험이 있었다. 남군 면접자가 있으니 당연히 이번에도 탈락이다. 어차피 또 떨어진 게 확실하다. 그럼 편하게 면접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관심도 없는 면접관들에게 계속 들이댔다.


"제가 대답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 그거 아는데..."


면접 분위기는 점점 화기애애 해졌고 어느 순간부터 면접관들은 나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이 아직도 생각난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들이 있던데 애는 어쩌냐?"


"시어머니가 봐주시고 계십니다."


"니 시어머니는 뭔 죄냐?"


'쩝~~~'



왜? 남자 군인들은 여자 군인들에게 이런 게 궁금할까? 선발 면접과 전혀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페루 면접 때는 이런 질문도 받았다. 면접 대상자는 8명이었다.


"왜 본인이 선발되어야 하는지?"


순서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제일 마지막 순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질문이 바뀐다. 밑도 끝도 없이 대령 면접관이 나에게 질문했다.


"너, 이번에도 떨어지면 여군 정책실 이런데 민원제기 할 거지?"


이건 또 뭐지? 차분해지자고 마음을 다잡고


"제가 실은 시험 볼 때마다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여군이라고 원서도 안 받아 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면접을 보고 있네요.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기다려야지요. 언젠가는 여군들에게도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3년 뒤 나는 우리 국방부에서 최초로 해외 군사교육 과정에  파견을 보낸 여군 장교가 되었고 칠레 모네다 궁에서 그 나라 대통령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칠레 모네다 궁에서 피녜라 대통령 부부와 함께


칠레 지휘참모대학 합격 후 면접관들과 동기였던 우리 과장님이 들려준 후일담이다.


육군본부 선발과에서 고민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칠레가 과연 안전한 나라인가? 여군을 보내서 혹시라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등등등


면접관들의 결론은...


"저 은 어디다 데려다 놔도 살아남을 이야!"


농담 섞인 후일 담 이었지만 군의 특성상 당시 책임자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잘 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만약, 다른 제2외국어처럼 프랑스에 1명, 독일에 1명, 이탈리아에 1명 등 스페인어도 스페인에 1명만  파견해도 됐다면, 스페인어를 하는 중남미 국가들이 살기 좋은 선진국이어서 남군 스페인어 지원자가 많았다면,


그리고 만약, 내가 선발시험에서 계속 낙방했다고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이런 기회가 나에게 왔을까? 조금 살아 보니 알겠다.


"실패는 했어도 포기는 하지 말자"


진리다.

 



그리고 2002년부터 배출된 육군사관학교 출신 여군들의 대거 등장이 한몫했다. 2019년부터 전, 후방 대대장으로 투입된 똑똑한 그녀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렇게도 들이대던 내게 그토록 무관심하던 국방부가 그녀들이 위관장교가 되었을 때 나를 제2외국어과정에 선발하였고, 그녀들이 영관장교가 되었을 때 해외 군사교육과정에 선발하였다.


이제 곧 그녀들이 대령을 달 것이다. 우리 군에도 국방분야 외교관, 즉 국방무관에 여군들이 배출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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