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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호철 Jul 02. 2022

문화의 역사 (2)

사람의 모순

  왜라는 의문에 관하여 진리라고 주장되었던 대답 대부분은 설득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문화가 제시한 답에도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의 제약 없는 확장이 왜라는 의문을 넘어선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문화는 진정으로 의문에 대답하고자 한 적이 없다. 문화체제의 존속은 대답의 진리 여부가 아니라 사람의 설득과 체제로의 편입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화의 확장과 영속은 왜라는 의문을 외면했을 때 가능해진다. 즉 사람의 존재 조건이 가진 근본적인 제약을 억압했을 때 체제의 확장을 위한 허구의 창조와 전파가 용이해지는 것이다. 


근현대의 여러 체제는 번영을 위한 무수한 대안을 제공하였으며, 이것은 구성원을 체제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이들 체제에서 숫자와 통계 그리고 데이터는 곧 진리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왜냐면 체제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수단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은 거의 없었으며, 앞으로도 이들 수단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대안으로 이루어진 결과물들을 짧게 살펴보면 세계전쟁과 빈부격차 그리고 날로 심해지는 환경오염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물론 체제적 관점에선 전염병의 일소와 인구 증가 그리고 세계화가 눈에 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일궈놓은 반작용적 측면까지 고려했을 때 체제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은 진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그들의 성과는 결국 자신들이 신뢰하는 수단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설득하였는가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문화에는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허구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이제껏 등장한 문화의 각종 체제들은 결국 사람의 설득을 위한 연극 무대였다. 이곳에선 허구적 설득의 재현이 이루어진다. 문화의 설득력이 힘을 얻어갈수록 재현을 진리라 믿는 사람의 수 또한 늘어난다. 체제에 있어 설득된 사람의 수는 곧 영향력이다. 


사람들은 설사 자신들이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지라도,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랬지만, 이 무대에서 내려온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좋든 싫든 연기를 계속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고, 문화는 물론 이런 상황을 늘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잘 알겠지만, 근현대 이전에도 그랬듯 오늘날에도 허구를 진리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의 존재가 궁극적으론 문화체제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경향은 근현대의 체제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지구적으로 확대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요즘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지구촌’이나 ‘세계화’와 관련한 언설은 근현대 체제의 영향력이 얼마나 넓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아무튼 근현대 체제들이 ‘사람은 왜 있는가’를 탐구하기는커녕 ‘사람이 정말로 무엇인가’조차 제대로 답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것의 탄생 이후 무수히 생겨난 대답은 ‘사람은 무엇이 아니다’였다. 이들 체제에서 진정한 사람이란 언제나 과거를 후회하며, 현재를 탐구하고, 미래를 갈망한다. 또한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지 않고, 주위의 위험과 기회를 살피며, 늘 미지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다. 체제에 있어 사람의 바람직한 행동 기준은 ‘우리는 무엇이 아닌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주변 세계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갱신하는 것이다. 체제가 보기에 우리는 한순간도 머무르거나 허투루 쓸 시간이 없다. 사람은 자신의 중요한 자산인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 또 시대가 바뀌어 계속해서 더 나은 가치가 생겨난다면, 사람은 기꺼이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근현대 체제에서 사람이 정말로 무엇인가는 언제나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 체제가 내놓은 대답엔 사람 개개의 역량에 관한 희망찬 묘사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체제는 그 중 어떤 것에서도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고자 의도하지 않았다. 이들 체제는 문제-해결의 연쇄를 가능케 할 무엇이든 현실에서 끌어다 쓴다. 그것이 법칙이나 자원 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가치까지도 말이다. 


역사적으로 근현대 체제야말로 진정 허구를 앞세워 사람을 세뇌하는 데 성공했다. 왜냐면 이것은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 현대인이라는 허구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체제가 제시하는 미래를 마치 스스로 떠올린 것으로 믿고 움직인다. 현대인은 이를테면 노예가 된 주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노예가 됐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주체다. 사람들은 현대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무엇보다도 근현대 체제가 역동적이고 유연해지도록 만들었다. 


사실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든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은 사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체제가 내세우는 모든 대안은 그동안 사람들의 지고한 노력으로 쌓아올린 축적의 결정판이다. 그런데 정확히 현대인은 반대로 생각한다. 체제가 없다면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체제를 진정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체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난지 오래다.


결론적으로 문화는 사람에 관한 의문에 답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 왜라는 의문엔 무능력하며, 무엇이란 의문은 회피한다. 이것이 문화의 한계다. 문화는 의식의 분별력에서 나왔고, 허구로써 쌓아 올려진 체제다. 때문에 문화가 사람의 근원적인 의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우리가 왜라는 의문에 도전하고 질문을 던지려 할 때, 문화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억압하거나 세뇌한다. 혹은 질문조차 매우 힘든 상황에 우리를 처하게 만든다. 우리의 질문이 체제 질서를 뿌리부터 흔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속을 바라는 모든 체제에 있어 왜라는 의문에 대한 관심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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