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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호철 Sep 27. 2022

근현대 체제들 (2)

사람의 모순

  이제 정말로 제기된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여타 체제를 포함하여 근현대 체제 역시 문제의 종결을 통한 구원을 의도했던 적이 없다. 근현대에선 체제의 원동력이 이전 체제처럼 지배가 아니라 문제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쏟아지는 문제들의 홍수에서 우리가 자신 이외에 다른 희망을 품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람이 계속해서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만이 체제의 확장과 영속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즉 근현대 체제에서 사람의 고통은 문제로 승화된다. 이 체제가 결코 구성원에게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면, 체제의 목적이 구성원의 궁극적인 안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불행에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를 걷는 것처럼, 사람들은 체제가 약속하는 문제의 종결과 구원의 약속에 빠져 앞을 향해 걸어가지만, 그 걸음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더는 걷지 못하게 됐을 때, 마침내 추락하고 만다.


  물론 위와 같은 가정을 매우 불편해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체제가 단 한시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들의 불확실한 상승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사람들의 진정한 목표이자 길잡이 노릇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물론 체제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문제의 일시적인 증가를 피할 순 없었지만, 이들 체제가 있었기에 인류의 오랜 숙제를 해결하고 이제 곧 모든 의문의 종착역으로 향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자본가들은 근현대에 생겨나 세계의 구도를 바꿔놓은 경제성장체제의 맨 꼭대기에 서 있는 집단이다. 이들은 인류의 급격한 성장이 가능했던 건 부의 교환과 투자를 창출한 자본주의적 기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이들에 의하면 만약 자본이라는 획기적인 관념이 세계에 생겨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마도 이전과 같이 여러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성장체제는 현실에 대해 인류의 지식이나 신뢰가 세계적으로 이합집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개개인은 이제 현실의 파도 앞에 기도할 필요 없이, 각자의 노력을 세계적 신뢰에 보탤 수 있게 됐다. 이는 모두 인류의 잠재력을 고유의 방법으로 끌어올린 자본의 개념 덕분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체제가 아마 인류의 변곡점을 만든 가장 놀라운 역사적 업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장체제야말로 근현대에 생겨난 상당수 문제의 근원을 이룬다는 점이다. 주기적으로 정보의 비대칭, 외부효과, 공공재의 비극 그리고 불완전경쟁을 발생시키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는 그중 매우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성장체제에 내재한 여러 원리는 세상에 온갖 부조리와 불공정 그리고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중이다. 사실 이 체제는 전 세계를 장악한 20세기에만 해도 빈부격차, 고용불안, 저임금 그리고 빈곤과 같은 불평등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다. 오히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 두드러진 다국적 기업은 전 세계의 부를 더욱 손쉽게 빨아들이고 있으며, 그 사이 부의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고, 국제사회는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여기에 너무나 느리게 대응하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는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충분한 식량이 생산되고 있음에도,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성장체제를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이 체제는 애초에 전체 자본의 순환이 아니라 소수 자본가의 자본 축적을 목표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말이다. 이는 딱히 새로운 관점도 아니다. 아무튼 성장체제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꽤 주춤거리고 있으며,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은 요원하다.


  다음으로 과학자는 학문 세계에서 주로 활동하는, 근현대에 혜성처럼 부활한 새로운 체제에 열정적으로 이바지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과학이라는 고도의 사고방식이 집약된 이후에 사람들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문제가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제시한 탐구 방법, 즉 관찰과 가정 그리고 실험이 있다면 어떤 문제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인류는 과학이 전해준 강력한 힘으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넘어 그동안 의문으로 남아있었던 분야를 개척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오늘날 지구상에 이들의 손길이나 관심이 닿지 않은 지역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은 우리가 먼 미래의 일처럼 남겨놓았던 의문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천문학자들은 지구 밖 우주를 망원경으로 샅샅이 들여다봤으며, 이론물리학자들이 내놓았던 공식이나 예측을 확정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 과학자들의 열정 그리고 과학적 발명을 통틀어 ‘과학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정신은 정말로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총량을 감소시켜 왔는가? 이것은 어떤 딜레마에 봉착해 있는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의문을 종결시켜버리겠다고 하는 과학자들의 정열로 인해 더욱 많은 의문과 그로 인한 문제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관찰하고 실험하기 위해선 먼저 문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문제는 현실과 세계의 경계에서 솟아나는 의문으로부터 나온다. 과학자들이 관찰하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의문은 생겨나고 그로부터 문제는 쏟아져 나온다. 물론 아직 현실엔 과학정신의 세계가 닿지 않은 현실이 거의 무한히 존재하며, 체제의 권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어쨌든 과학자들의 약속과는 달리 의문의 발굴과 문제의 인지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 과학자의 노력으로 과학정신은 의문의 끊이지 않는 세계를 창안해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과학정신은 앞으로도 체제로 존속할 수 있을 것이며, 과학자들은 여전히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과학정신이 권력을 확장하는 방법은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해결해내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정신은 비슷한 시기에 체제로써 성장한 기술발전과 손을 잡는다. 과학정신의 쌍둥이인 기술발전은 과학정신이 밝혀놓은 해결의 단초를 구체적으로 실현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과학정신과 기술발전의 효용을 직접적으로 체감한다. 


  아마 향후 먼 미래에까지 앞서 언급했던 체제가 만드는 세계의 영향력은 지대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철저히 소수 자본가(지주, 사업가, 주주 등)의 이익만을 위해 작동하며, 그러면서도 다수의 이익에 가장 기여한다고 개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한다. 과학정신과 기술발전은 반대로 다수에게 이로운 특정한 방법을 제시해 필요성을 체감하도록 하고, 체제와 관련한 소수의 연구자 집단이 지속적으로 방법론을 개발하는 데 모든 지원이 몰린다. 이러한 방향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체제는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의문의 발명과 문제의 재생산에 가장 치밀하면서도 능숙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체제들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힘든 이유는 그만큼 문제-해결 메커니즘이 가지는 힘이 다른 세계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현시대적 역학관계 이외의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체제에 있어 사람의 가능성을 쥐어짜고 다양성을 억압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다. 사람은 언제나 고통 속에서 살지만, 체제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고통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특정 체제가 사람의 능력을 착취하거나 설득하는데 능해질수록 사람들의 고통은 다양해진다. 물론 사람들은 체제가 전가하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늘 새로운 세계를 모색해왔고, 그것이 곧 역사적 변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체제 사이의 빈틈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체제는 현재의 성공을 더욱 고도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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