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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B Apr 23. 2020

싫어하면 도망갈 곳이 없어진다  

숫자 헤이터가 만난 숫자의 세계



가장 최근에 내가 들었던 사내 교육은 '좋은 보고서 작성법'이었다. 사실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내용은 아니었으나, 길게 말해봤자 재미는 없을 테니 핵심만 말하자면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제목부터 드러나는 것이 좋은 보고서라는 것인데, 아무리 봐도 이 글의 제목은 망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라도 바로 시작해야겠다. 이것은 5년 차 리서처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선 리서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위키에서 리서치를 치면 ‘연구’라고 나온다. 그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식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한 인간의 활동이며 세상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인간이 새롭게 알게 되었거나 이미 존재하던 지식의 발견, 해석, 정정, 재확인 등에 초점을 맞추는 체계적인 조사를 일컫는 말이다.”



음. 이것은 아니다.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렇게 거창하지 않다. 도대체 리서치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나도 갑자기 궁금해져서 찾았으나, 네이버에서 친절하게 ‘직업으로의 리서치’를 알려주는 곳은 없는 것 같다 (각종 리서치 회사의 홈페이지와 알바공고는 나온다) 대신 나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네이버 사전에서 리서치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예문들이다.




리서치 회사, 리서치 업체는 별다른 설명 없이 예문만 던져줄 정도로 익숙한 직업군이나 그곳이 어떤 구조나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리서치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좀 나을까 싶어서 들어가 봤는데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냥 자기네 회사만 주야장천 자랑하고 있다. 심지어 업계 탑인 회사는 검색했을 때 홈페이지가 뜨지도 않는다. 정말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이 리서치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눈 앞이 흐려진다. 리서치는 어디에나 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곳이다. 큰 주제 의식으로 따지자면, 내가 쓰려는 이야기도 이 범주에 속해있다. 하여튼, 리서치 업계에 대해 궁금하고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다면 앞으로 이어질 글들을 잘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 싶다.

(주 : 2019년 기준 리서치 업계 탑은 칸타코리아이다. 사실 2019년만 그런 건 아니고 몇 년째 그러고 있다. 업계 탑인데 처음 들어봤다고? 물론 그럴 수 있다. 시청률 조사로 유명한 TNS는 들어봤는지. 거기가 바로 칸타코리아이다. 추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지만 시청률 조사를 하는 TNS 미디어는 사실상 이름만 빌려준 곳이다)






어수선한 내용들을 뒤로하고 본론을 말하자면 나는 동종업계 사람들과, 나를 돈 주고 쓰고 있는 클라이언트(보통 대기업의 리서치 코디)를 제외하고 리서치 회사의 정체성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직업군을 딱 하나 알고 있다. 바로 우리 회사가 위치한 곳을 거점으로 이동하는 택시기사님들이다. 그분들은 사거리에서 등대처럼 24시간 내내 불을 밝히고 있는 우리 회사가 뭐 하는지는 관심이 없어도 룸살롱도 문 닫을 준비를 하는 새벽 시간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잘 안다. 참고로 나는 2014년 리서치에 처음 '정식으로' 입사하여, 약 5년 동안 (1) 소규모 리서치 회사 (주 : 현재 망한 회사)  (2) 리서치 회사인지 아닌지 정체성이 애매한 회사  (주 : 곧 망할 것 같은 회사)  (3) 메이저 리서치 (주 : 왜 안 망하는지 궁금하지만 망할 일 없어 보이는 회사)를 모두 섭렵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있다. 규모는 각기 달라도 리서치 회사가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은 끝없는 야근이라는 것을.




다시 돌아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새벽 세네시 경, 사람이 없는 이 동네를 배회하던 택시 아저씨의 의사결정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 택시기사들이 선호하는 스팟이 어딘지 생각해보면 되는 것이다.


(1) 태울만한 손님이 있는 곳
(2) 술에 취하지 않은 손님을 태울 수 있는 곳



(1)이 필수조건이라면 (2)는 꽤 매력적인 옵션일 것이다. 그리고 새벽녘에 우리 회사 근처를 배회하는 택시 기사님들은 이 회사가 (1)과 (2)의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장소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새벽에 만난 택시 기사님들 몇분이 이를 알려주실 때마다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한 심오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리서치 회사란 어떤 곳인가? 다시 한번 대답하자면 리서치 회사는 특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돕는 곳이다. 내가 클라이언트에게 갖다 바치는 제안서의 큰 주제 의식은 대충 이렇다. 우리는 기관, 기업, 개인들이 보다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활보하기 위해 적절한 조사 대상자들에게 각종 돈과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데이터를 얻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 데이터가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 내는 직관을 이길 수 있는가? 우리 회사 앞을 지나는 택시 기사들은 그 어느 누구도 어떤 사거리에 위치한 회사 하나에서 새벽에 사람이 기어서 나온다는 데이터를 제공받은 적이 없다. 덧붙여, 실제로 이러한 현상이 잘 목격되어 데이터 화 된다고 하더라도 이 회사 앞이 홍대나 강남을 이기는 숫자를 그릴 리가 없다.(*우리 회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절대로 사람을 300명 이상 뽑지 않는 소규모 회사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직관에 근거하여 내리는 의사 결정이 때로는 정말 정교한 방법으로 수집하고 분석한 데이터보다 더 제대로 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중 '직관에 기반한 의사결정'과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결정'의 비율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데이터가 없으니 단언할 수 없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을 쉽게 믿는 존재이며,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인의 감이 가지는 승률을 매우 높게 산다는 것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경험을 통해 축적된 결과가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일은 매우 적다. 일상 내의 단순한 의사 결정뿐 아니라, 회사 내에서 돈벌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의사 결정에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터는 중요하다. 객관적인 근거 없이 경험에 의지하고 있는 데이터에는 필연적으로 편향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많은 기업들은 이를 알고 있고, 그래서 경험적으로 답을 다 알고 있는 것도 굳이 돈 주고 조사를 하고는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생각하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 리서치를 통해서 대단히 새로운 인사이트가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사 요청이 오는 대다수의 프로젝트의 답은 이미 클라이언트가 가지고 있다. 다만 그들은 더 분명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 조사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리서치 에이전시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택시기사 이야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자. 조금 더 오버하는 것일수 있다. 택시 기사님들은 조사에 대해서 모르고, 데이터가 가지는 힘이 어떤 것인지 알 가능성도 낮은 분들이지만 경험을 근거로 한 꽤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셨다. 그렇다면, 리서치 회사는 어떠한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돈 벌어먹고사는 리서치 회사에서 직관은 어떤 존재인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선배인 리서처들 사이에서는 '리서치 회사가 건물을 사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까지 건물을 산 리서치 회사는 모두 (1) 건물 사기 전에 비해 기세가 예전 같지 않거나 (2) 혹은 망했다. 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수백 개의 리서치 회사가 있다. 그 수백 개의 회사 중 자기 건물을 산 리서치 회사는 채 열개가 되지 않는다 (열개도 많이 쳐준 것일 듯) 그중에 몇 개 망했답시고, ‘리서치 회사가 건물을 사면 망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데이터에 기반한 사고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물론, 대한민국에서 건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풍수지리부터 시작된 오랜 미신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일단, 건물 하나 사는 게 개집 사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의사 결정 과정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내가 이러한 농담을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상당수의 의사 결정이 객관적인 근거나 합리성과는 동떨어져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5년 간 내가 애써 모르는 척했으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리서치 업계는 참으로 이상한 곳이며,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이 싫어질 것 같으나 나는 한 가지를 알고 있다.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벗어날 수 없다. 근거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수학이 아니라 숫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리서치를 오겠답시고 대학원까지 갔던 거를 보면 이거는 꽤나 근거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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