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혜 지음
지난 십 년간 내가 한 잘못한 일을 꼽으라면 나를 충분히 돌아보지 않고 다른 선택지를 성실히 찾아보지 않고
관뒀던 회사에 재입사한 일이 그중 하나이다.
지난 십 년간 가장 재미와 보람을 느낀 일을 묻는다면 그렇게 재 입사한 회사에서 했던 일이 열 손가락 중 다섯 개는 족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래서 인생은 아이러니라 하는 걸까.
2020년은 여러모로 모두에게 힘들고 복잡하고 지긋지긋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내 개인적인 심정도 그에 못지않은 상태였다. 그중 우울과 분노와 외로움도 꽤 컸는데, 이런 감정들만을 얘기하자면 원래 나이 들면 그렇다느니, 갱년기가 가까와서라느니 라는 말들만 주야장천 귀에 박힐 게 뻔하기 때문에 아예 입밖에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100명이 훨씬 넘는 내가 속한 담당 조직 내에서 나이로 따지면 여자 중 내가 서열 3위쯤은 될 것이다. 그보다는 더 아래가 되기를 바라지만 (젊은 층에 속하고 싶은 욕구는 아직 남아있다!) 현실은 현실이다. 팀장급의 파트장들만 보아도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 투성이고, 그들에게는 깍듯하게 구는 남자 후배가 나이를 빙자한 유머 같지 않은 유머를 자꾸 던지기도 한다. 당연히 불쾌하다. 처음에는 정중히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하다가 그래도 못 알아먹기에 정색을 하고 화를 냈더니 그제야 사과를 하고 조심하는 기색을 보인적이 있다. 기색을 보인적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진심 어린 사과를 너무나 여러 번 하는 통에 그 진정성이 장난이 아닌가 마침내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농담이라고 하는 부류들은 절대 남자 선배에게 그런 식의 언행을 보이지 않는다.
그 사건을 통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땅히 화를 내어야 할 사항에 대해 화내지 않고 , 좋은 얼굴만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를 깨달았다.
우울과 피곤은 다르다.
모르는 것과 어려운 것은 다르다.
분노와 응석은 다르다.
배고픔과 외로움은 다르다.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중
회사생활을 하면서 분노할 일이 이것만일까. 20년 경력을 넘기면서, 그중 19년을 한 회사에서 일을 했으면서도 아직도 나는 극심한 외로움과 명징한 분노심에 부들거리며 잠 못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일을 하기 위한 계약적 관계일 뿐인데도, 상사의 불쾌함까지 받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란 말이다!), 고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계속 공부하지만 일에서 이를 나누고 토론할 동료가 없을 때면 무진장 외롭고, 상하의 권력관계에서 오는 부당함과 누구나 다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남녀 간 불평등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들을 꼽다 보면 그냥 확 회사를 관둬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드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이다.
금요일 저녁부터 인후염 증세가 있어 열이 37도가 계속 넘는 상태였고, 약을 먹어도 열이 내리지 않길래 반은 자가격리 상태로 지내다 보니 주야장천 잠만 잘 수도 없어 그동안 주문하고 못 읽었던 책들을 읽게 되었다.
그중 한 권이 이다혜 기자의 <출근길의 주문>
내가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여자 상사는 나보다 6살쯤 많으신, 23살 대학 졸업도 전에 취업하셔서 당시 30대 후반의 미혼인 차장님 한분이 유일했다. 그다음으로 과장도 없이 내 또래 여자 대리들과 그 아래 사원들이었는데 연령대가 20대 중반에서 많아야 서른 한 둘 정도. 그나마 내 또래 여자 대리들도 반 이상은 차장 진급을 앞두고 회사를 떠났다. 함께 성장할 동료들이 사라진 셈이다. 성장에 있어서 롤모델도 매우 중요한데 사실 회사 생활하면서 롤모델로 삼을 선배를 만난 경우는 남녀를 불문하고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하물며 여자 선배라 한정한다면 그 샘플이 너무나 작아서 고민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다행히 요즘 후배들을 보면 선배들보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경우가 종종 보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해외마케팅 유일한 여자 차장이던 그분 보다 내 나이가 훨씬 많은 때가 되었다. 여자 후배도 그 당시에 비해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과장급 이상 남녀 비율을 보면 남자가 월등히 많다.
당시에 내가 좀 더 인생의 커리어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더라면, 좀 더 전략적으로 사고했더라면, 좀 더 분명하게 내 목소리를 내는 만큼 나의 이익도 요구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되는 부분이 많은데 이런 얘기들을 후배에게 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꼰대라 욕먹기 십상이기에 망설여지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 후배들에게 슬며시 안겨 주고픈 한 권의 책이 바로 <출근길의 주문>이다. 구구절절, 한 장 한 장 공감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토록 생생한 (여자) 직장인의 이야기라니. 여자 직장인이라 하면 임원까지 승진한 분들의 성공스토리만 볼 수 있는데, 좀 더 합리적이고 쿨하게 보통 일 잘하는 우리 선배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다행이고, 또 이제 회사를 관둬야 하나 불쑥불쑥 들던 생각을 접고 조금은 책임감을 가지고 더 버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이 책을 여자 후배들 뿐 아니라 이 시대 여자를 동료로 둔 많은 남자분들도 함께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원하는 분은 신청하시라. 기꺼이 선물해 드리겠다.
덧) 지지부진 지나온 세월은 그렇다 치고, 좋은 선배가 될 기회는 아직 남아있고. 그러니 어떤 선배가 좋은 선배이고 직장 상사의 미덕이란 과연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우리 모두가 읽어도 좋을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출근길의주문 #이다혜
#직장인의 필독서
#내가하고싶은이야기가바로이거란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