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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ee Mar 24. 2019

《빙평선》 따라  홋카이도 동부 여행

사쿠라기 시노 배경여행





다리 난간에 붙은 가스등 아래를 지나 강을 건너오는 이미지가 그야말로 여자에게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계속 오빠가 하고 있었어?"
“아뇨, 이번 달부터 시작했어요”

- 사쿠라기 시노, <바다로 돌아가다> 중에서



《호텔 로열》이라는 소설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란 작가를 처음 접했을 때 그녀의 소설은 내게 과도하게 농밀해서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언젠가 홋카이도 동부에 갈 일이 생긴다면 그때 마저 읽어야겠단 생각에 책을 덮어두었다. 그리곤 한참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아사히카와에 있는 OMO7이란 호텔 책장에서 사쿠라기 시노란 이름을 다시 만났다. OMO7의 책장에는 홋카이도를 주제로 하는, 혹은 홋카이도 출신 작가들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는데, 그 안에서 사쿠라기 시노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에 도착하는 날에 맞춰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을 몇 권인가 집으로 배송시켜 두었다. 그리고 홋카이도 동부 여행을 할 계획을 세웠다. 《빙평선》란 단편 모음집을 읽던 나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세계에 흠뻑 빠져 들기 시작한다.



사쿠라기는 삿포로에서도 동쪽으로 300킬로미터나 떨어진 구시로란 도시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에는 재판소 타이피스트로 근무했지만 결혼 후엔 계속 전업주부로 지냈다 늦은 나이에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작품 대부분의 배경이 구시로를 중심으로 하는 홋카이도 동부다. 소설을 읽다 보면 당장이라도 홋카이도 동부로 달려가 그 문장 그대로를 느껴보고 싶단 충동에 시달리곤 한다. 특히 《빙평선》이 그랬다. 여섯 편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는 이 책 마지막에 실린 <빙평선>에는 세이치로란 남자와 몸을 팔아 먹고사는 도모에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도모에는 어느 날 갑자기 세이치로가 살던 마을에 와서 살게 되고, 어부로 살고 싶지 않은 세이치로는 독하게 공부를 해서 도쿄대에 합격한다. 그리고 둘은 10년이란 세월에 거쳐 관계를 갖게 된다. 나는 아바시리에서 시레토코로 가는 길에 눈을 크게 뜨고 함석집을 찾았다. 소설에서 도모에가 사는 함석집을 찾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관 앞에 하얀 깃발이 걸렸을 때는 손님이 있다는 뜻이야”라는 소설 속 이야기가 마치 진짜인 것처럼 깃발이 걸린 집이 없을까 찾았다. 물론 소설 속 문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을 만날 순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빙평선’을 보았다. 대지도 아닌 물도 아닌 하얀 얼음이 편평하게 뻗어 하늘과 맞닿아 있는 선. 유빙이 떠내려오는 이곳 시레토코 앞바다가 아니면 만나기 어렵다. 바다는 좀처럼 얼지 않기 때문에. 도모에와 세이치로가 빙평선을 눈앞에 둔 장면에서 소설 <빙평선>은 막을 내린다. 빙평선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빙평선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밤이 깊은 구시로에 도착했다. 이곳은 《빙평선》에 실린 또 하나의 근사한 작품 <바다로 돌아가다> 속 배경이다. 1974년 3월. ‘춘분 대설(봄에 내리는 큰 눈)’에 기네코가 이발소를 운영하는 게이스케를 찾아간다. 강 입구에 걸린 다리를 건너서. 이 다리는 구시로의 명물인 누사마이바시로 실제로도 굉장히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다리였다. 다리 위에 서 있는 4개의 여인 동상을 주황빛 등이 비추고 있었다. 4개 동상은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봄에 찾아와 여름에 떠나는 기네코의 모습과 겹쳐졌다. 원래 누사이바시는 나무다리였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을 한 다리는 1976년에 새로 놓인 것. 기네코의 향기가 게이스케의 방에서 사라졌을 무렵, 다리의 교체 공사가 시작된다. 그렇구나. 나는 기네코가 춘분대설에 건너온 다리를 영원히 만날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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