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nee Jul 06. 2019

비로소 츠타야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마스다 무네아키, 《츠타야, 그 수수께끼》

일본에 오면 하루가 일찍 시작된다. 이른 시간에 해가 뜨기도 하고, 혼자 자는 호텔방에서 혹여나 늦잠이라도 잘 까 봐 암막커튼을 치지 않고 자기 때문에 창문으로 강렬한 아침햇살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최근 도쿄로 출장을 올 일이 종종 생겨났다. 어제는 아침 6시에 잠에서 깨어나서 멍하니 앉아 있다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출근시간은 한국에 있을 때처럼 10시이기 때문에 무려 4시간이나 시간이 남아 있다. 무얼 한담.


머리맡에 놓인 마스다 무네아키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달 하코다테에 있는 츠타야 서점에 들렀는데 내가 생각보다 츠타야에 대해 잘 모른단 사실을 상기하고 이번 출장길에 챙겨 온 책이었다.


“잠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은 옛 야마테 거리와 마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세 건물 사이에는 몇 갈래의 산책로가 있지요. 저는 그중에서 한 산책로에만 뒷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가든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붙였고, 신사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습니다.”

- 마스다 무네아키, 《츠타야, 그 수수께끼》


문득 책에 나온 ‘뒷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걸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산책로는 마스다 무네아키가 신사의 도리이를 통과해 본전까지 가는 길을 떠올리며 츠타야 서점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선물하기 위해 의도한 기획이란다. 이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 호텔에서 다이칸야마가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고맙게도 츠타야 서점은 아침 7시부터 문을 연다. 다시 이불로 들어가는 일은 포기하기로 하고 호텔을 나왔다. 다이칸야마 역에서 내려 츠타야 서점까지 걸어가는 길. 고요한 마을 풍경에 아침의 활기가 스멀스멀 더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단정히 차려입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츠타야 서점엔 이른 아침부터 이미 야외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물로 들어갔다. 자동차 관련서적들이 모여 있었는데, 차에 관심이 없는 나는 대충 둘러보고 나와 TRAVEL이란 글자가 적힌 건물로 옮겨갔다. 여행 잡지에서부터 가이드북, 각종 단행본들이 형태별이 아니라 지역별로 모여 있는 책장을 신나게 좇아갔다. 사실 이곳 여행 섹션의 구성 등이 좋거나 특별하다 느꼈다기 보단 나는 어느 서점에 가도 여행 책이 있는 곳을 좋아한다. 게다가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이 문을 연건 2011년. 이미 8년 전 일이다. 워낙 화제가 된 장소라서 이곳의 구성을 닮은 서점들이 한국에도 상당히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신선함을 느끼지 못할 만도 하다. 가운데 여행 관련 상품이 놓여 있고, 주변에 관련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스토케에서 만든 어린이용 여행 가방이 있었는데, 장난감 말처럼 탈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아보니 기내에서 아이용 침대로 변신시킬 수 있단다.) 내가 아이 엄마라면 정말 갖고 싶겠구나란 생각을 하며 주변에 놓인 책을 슬쩍 보니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주제로 한 책들이 있었다. 옆방으로 옮겨갔다. 여행용 파우치 등이 보였다. 에휴. 또 파우치인가. 조금 실망스러웠다. 한국 서점에서도 책장 곁에서 여행용 파우치를 파는 것을 많이 봤다. 따분해하며 지나가려다 사진에 나온 설명에 눈길이 멈춰 섰다. 어라?


최근 출장이 잦아진 나는 매번 화장품 파우치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스킨, 수분크림, 선크림, 파운데이션, 아이섀도, 마스카라, 하이라이터 등을 담은 파우치는 항상 잔뜩 부풀어 올랐고, 호텔방에 딸린 좁은 화장실 안에서 흐물흐물해 제대로 고정이 안 되는 파우치에 손을 넣어, 이미 잔뜩 뒤엉켜 있는 화장품 중 하나를 빼서 쓰는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매번 뚜껑은 하나둘 날아가기 마련이고, 손가락이 끼여 아프고 등등. 이 파우치는 크게 펼쳐져서 간이화장대도 될 수 있고, 안쪽에 고무줄이 붙어 있어 몇 가지 화장품을 고정시켜둘 수 있는 것이었다. 고무줄 덕분에 화장품들이 뒤엉키지 않고, 펼쳐지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찾기도 편하다! 어쩌다 보니 파우치 홍보를 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이런 신문물 소식에 매우 느린 사람이다.)


어쨌든 여행을 좋아하고, 종종 다니는 사람이 이곳에 와서, (심지어 그날 아침 화장품 파우치와 한바탕 씨름을 끝낸 사람이) 여행책들 사이에서 이런 상품을 발견한다면 분명 그냥 빠져나가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파우치를 사기로 마음 먹는다. 파우치도 샀는데 조만간 여행을 가야겠지. 어딜 갈까. 다음에 떠날 곳을 꿈꾸며 그곳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도쿄 근교에 있는 가마쿠라, 쇼난을 다루는 잡지만 해도 여러 권이었다. 그렇지만 2시간 뒤에 출근을 해야 하는 나에게 당장 출발할 수 있는 곳들은 그림의 떡. 홋카이도 책장으로 넘어가서 얼마 전 다녀온 삿포로 시계탑의 일러스트가 표지에 들어있는 《홋카이도 도감》을 펼쳐보았다. 곧 가볼 후라노의 라벤더 오일 추출방법이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여행 잡지들 사이에서 집어 든 삿포로를 특집으로 하는 잡지에서는 흔히 알려져 있는 수프 카레집이 아닌 색다른 수프 카레 가게를 다루고 있다. 츠타야 서점 안에 있는 스타벅스로부터 진한 커피 향이 풍겨 나왔다. 여기 앉아서 좀 읽다가 갈까. 나의 마음은 이미 홋카이도에 가있다. 행복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역시 꼭 가야지. 마침 곁에 여행사(T-TRAVEL)도 있다. 대략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물어볼 수도 있다. 아! 이곳은 이런 공간이구나. 나는 비로소 츠타야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파우치와 책 몇 권을 계산하고 나서, 점원에게 마스다 무네아키 씨의 책에 나온 가든 스트리트가 어딘지 물었다. 점원은 ‘그런 길이 있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신사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하던데…….” (전날 읽어 놓고 잘 못 기억하고 있는 나.) 점원은 신사가 바로 건너편에 있지만 길 건너자마자 바로 있기 때문에 특별히 산책로라 할 만한 길은 없을 거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든 스트리트는 신사 안의 길처럼 영감을 주는 길일뿐 실제 신사와는 전혀 관계없음을 깨달은 나는 문 앞까지 나와 친절히 설명해준 점원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은 건물들 사이사이로 산책로를 조성해두었고, 그중 하나가 마을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가든 스트리트란 이 길을 의미하는 듯했다. 마스다 무네아키의 말대로 특별한 표식을 두지 않아 사색의 시간을 시각적으로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크게 들려오는 새소리는 오히려 더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나는 이곳처럼 공간으로 구현된 배경여행의 형상을 상상하며 걸었다. 몇 가지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언젠가는 작지만 배경여행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란 꿈을 꾼다. 고민이 있거나 기획을 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마스다 무네아키가 머물며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카페 ASO가 길 건너에 보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