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출판 관련
내가 ‘누드 제본’이라는 것을 안 건 지금은 고인이 된 윤지회 작가의 『사기병』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자신의 투병기를 담담히 담은 책인데 그 책이 ‘누드 제본’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보통 책등이 표지 다음으로 책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선전판이 될 텐데 이 책등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고 실을 엮은 듯한 패치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사극에 나오는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오침안정법’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누드 제본의 신기한 책을 펼치는 순간 완전히 반해버렸다. 대부분의 책은 펼치기가 무섭게 닫힌다. 항상 무언가로 누르고 있어야 한다. 그게 손이든, 휴대폰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그런데 누드 제본 책이라는 것은 펼치면 그대로 ‘쫙’하고 사정없이 펼쳐진 그대로 있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편하던지. 제본 방식에 만족하며 읽은 책은 처음이었다. 그 책을 소개한 작가님이 그러는데 누드 제본은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신경 써서 만든 책이라는 이야기였다.
책을 읽다가 손을 잠시만 다른 곳에 두면 책이 ‘턱’ 덮이는 일은 아주 성가신 일이다. 읽다가 펼치고 또 덮이고 또 펼치고, 잡고 읽어야 하고 누르고 있을 만한 다른 물건을 찾고. 그런 과정이 전혀 필요 없는 누드 제본이라는 형식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한참 후에 『책과 노니는 집』이 누드 제본으로 리커버 되어 독점 판매 중이라는 광고를 봤다. 안 그래도 유명한 책이 누드 제본으로 리커버 되었다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책을 받아 펼친 순간 사랑에 빠졌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펼쳐진 채로 책상에 딱 붙어있었다. 책은 펼치면 닫혀야 하는데 너무도 당당히 활짝 펴져서 어느 봄날 흐드러지게 벚꽃 핀 밤의 아름다운 정경을 내 눈에 콕 박아주었다. 그때부터 누드 제본이라는 말이 보이면 일단 닥치는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한때 많은 출판사에서 유명 작가들의 신간 판촉 이벤트로 ‘누드 제본 수첩’을 사은품으로 판매한 적이 있다.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 정세랑 작가의 『보건 교사 안은영』, 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 등이 그 예이다. 나는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사은품인 ‘누드 제본 노트’가 갖고 싶었다. 책의 표지와 똑같은 표지로 출판사에서 저마다 정성 들여 만든 수첩들이다. 현존하는 누드 제본 수첩은 내 손에 다 넣겠다는 마음으로 그 책들을 사들였고 내 마음에 쏙 드는 노트들을 갖게 되었다. 이것들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 무슨 책을 사고받은 건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 목표는 단지 누드 제본 수첩이었을 뿐이었다.
누드 제본은 책을 읽을 때도 아주 편하지만 수첩처럼 무언가가 쓰여야 할 때는 발군의 기능을 발휘한다. 수첩의 양 날개가 테이블에 딱 붙듯이 펼쳐진 하얀 면에 필기구가 슥삭슥삭 지나가도 끄떡거리거나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다 받아준다. 어설프게 펼쳐져 쓸 때마다 접히려고 하는 수첩에 끄적거려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누드 제본 노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낯을 가리는 편이다. 문제는 항상 처음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듣고만 있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이야기도 잘하고 웃기도 하고 분위기 봐 가며 농담도 한다. 꽤 친밀해졌다고 생각하고 헤어진 후, 다음에 만날 때는 또 처음처럼 낯을 가린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치 제본이 너무 짱짱해 펼치기가 무섭게 덮여버리는 새 책처럼. 상대는 충분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나면 어색해하며 낯을 가리는 모습을 보여서 예전에는 차갑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책의 이음새도 자꾸 들춰보면 느슨해져 굳이 꽉 누르고 있지 않아도 보기 불편해지지 않는다. 나도 낯을 가리다가 친숙해졌다가 다시 낯을 가리고 또 친숙해지는 과정을 몇 번 거치고 나면 오랜만에 만나도 먼저 반갑게 인사하고 소통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누드 제본 같은 사람도 있었다. 처음 봤는데 스스럼없이 쫙 펼쳐서 다 보여준다. 아이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나이가 들면서 맺게 되는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유형의 사람을 만나는 게 아주 드물기는 하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말투와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는데 자랑도 하지 않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특히나 혼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자리에 있을 때 그런 귀인을 만나면 8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다리도 펴지 못하고 앉아 가야 하는 이코노미석 창가 자리 같은 불편한 자리에서 구원받는 기분이 든다.
‘누드 제본은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데 출판 업계에서 많이 제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손이 많이 가 비싸진 제작 단가 때문에 수지 타산이 맞지 않나 보다’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혹은 훌륭한 홍보 수단인 책등을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을 숨기지 말고 마음 문을 열고 사람을 대하라고 쉽게 말한다.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오픈 마인드의 사람을 이렇게 찾기 힘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기만으로는 아쉽고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조금 더 보여 줄 수 있는 형태. 나를 아는 남에게는 솔직하게 터놓지 못하는 속내를 불특정 다수의 완벽한 타인에게 말하는 게 책이지 싶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어 하는 걸까.
내가 가진 출판물 관련 굿즈 중 가장 아끼는 것은 누드 제본 수첩들이다. 섣불리 쓰고 나면 다시 구하기 힘들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중 아끼는 것들은 아직 포장 비닐도 떼지 않고 쓰임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아끼는 노트들은 대부분 필사 노트로 사용하고 있다. 언젠가 정말 베껴 쓰고 싶은 글을 만났을 때, 제일 아끼는 누드 제본 수첩에 쓰고 싶은 글을 만나게 될 때, 그것은 자신을 싸고 있는 비닐을 벗고 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묵묵히 볼펜의 머리를 받아들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글을 만나는 날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올까 봐 아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