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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ure Nov 05. 2019

[블레드] 과정도 여행

자그레브에서 블레드까지

새벽 7시 류블랴나행 버스를 탔다. 자그레브에서 블레드로 가려면 우선 류블랴나로 가야 했다. 하루에 2번뿐이 이 버스를 타기 위해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의 자그레브 시내를 지나갔다. 다행히 버스터미널이 멀지 않아 새벽시간의 교통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늘 활기 차고 빠른 말 걸음을 재촉하지만 즐겁고 환한 표정을 찾는 건 사치 같았다. 놀러 온 나도 새벽에 나가려니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자그레브 새벽 풍경
버스를 타고 국경을 통과했다

고속도로에서 출입국 심사를?

자그레브에서 약 2시간여 버스를 타고 슬로베니아로 국경에 들어왔다. 유럽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갔지만 이렇게 육로로 국경을 통과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국경이라고 철책이 있거나 군인들이 상주해 있지 않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같은 곳 한편에 출입국 사무소가 있다. 모든 승객은 내려서 여권을 들고 들어가면 출입국심사를 받는다. 출국심사라고 해봐야 여권만 주고 도장을 찍어준다. 그리고 바로 옆 창구에 다시 여권을 주면 입국심사가 끝이 난다. 입출국의 경계가 거의 없는 서유럽에 비해 EU 가입국이지만 동유럽의 국경은 그에 비하면 삼엄한 편이었다.



출입국 도장에 비행기와 자동차 그림이 귀여웠다. 들어올 때는 비행기, 나갈 때는 자동차. 이런 뜻인 듯하다.

국경을 지나니 본격적인 슬로베니아 풍경이 보였다. 슬로베니아라고 해도 시골은 여느 동유럽의 풍경과 차이는 없었다. 시내로 들어가니 확실히 자그레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도시는 작아도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고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사람들로 만들어진 풍경, 도시

활기찬 거리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시의 생기는 그곳에 사람이 주는 힘으로 이어간다. 시험이  끝나고 크리스마스 휴가로 이어지는 시즌이라 거리에는 막 시험을 마친 것 같은 학생들이 많았다. 다들 표정이 다양한 걸 보면 역시나 거기나 여기나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이다. 여행지에서 현지인들 구경 혹은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와 너무 다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그들도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다 같은 사람이고,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기도 했다. 무료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맥도널드 앞에 모여있는 그들이나 나나

류블랴나 버스정류장에 내려 블레드로 향하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매표소에서 블레드행 버스 티켓을 끊고 그에 맞는 승강장에 가서 버스를 타면 된다. 근데 좀 다른 점은 버스를 승차할 때도 티켓을 끊을 수 있었다. 같은 티켓인데, 가격이 달랐다. 버스기사에게 구매하는 게  더 저렴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는데, 매표소에서 구매하는 건 일종의 예매고 버스기사에게 구매하는 건 현장 구매의 개념이었다. 일종의 예매 수수료이다. 매표소에서 이미 표가 다 팔렸으면 현장 구매는 불가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매하는 게 저렴하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여행자 입장에서 어디에 무슨 버스가 있는지 찾기 힘들기 때문에 버스에서 현장 구매하는 건 여행자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료 와이파이 맛집 맥도널드, 나도 그중 하나였다
류블랴나 버스터미널, 읍내 정도 규모

다시, 여정은 시작되고

목적지인 블레드로 향했다. 알프스 산맥 아래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류블랴나가 보였다. EU 가입 동유럽 국가 중에 유로화를 쓰지 못하는 국가도 많이 있는데, 슬로베니아의 경우 유로화를 사용한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이 자국의 화폐가치가 유로화보다 높아 안 쓰는 나라도 있지만, 동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는 유로화보다 자국 화폐가치가 낮기 때문에 유로화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슬로베니아는 동유럽에서 몇 안 되는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인 셈이다.


동양인은 처음이야?

류블랴나에서 블레도 버스로 국도를 한참 달렸다. 작은 동네 동네를 거쳤고, 시내로 들어가면서 이 버스는 시내버스가 되었다. 마을 정류장을 서면서 동네 주민들이 타기 시작했다. 학교 앞인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우르르 타기 시작했고, 그들의 시선은 맨 뒷자리 나에게 꽂혔다. 속으로 너무 쳐다보는 거 아냐. 동양인 처음 보나.라고 생각했다. 블레드 호수는 이미 유명한 관광지일 테고 그곳으로 가는 관광객도 많이 봤을 텐데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그레브-블레드 현지 투어가 생각났다. 보통의 한국 관광객은 교통편이 불편하기 때문에 현지 투어를 신청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렵고 긴 시간을 들여 이 코스로 가는 관광객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우리 동네에 이상한 형이 버스에 타고 있다.라는 의문을 충분히 가질 만했다. 이런 시선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여행객보다는 낯선 사람이 나았다. 어차피 이곳에 난 이방인이고 애써 모른 척하는 어른보다 그저 본능적으로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시선이 어떤 랜드마크 보다 신선하고 즐거웠다.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그렇게 몇 개 정거장을 건너니 신선한 시선의 중학생들도 모두 사라졌다. 아직 블레드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아 풍격만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한 승객이 이번 역에서 내리라고 했다. 속으로 내가 어디를 가는 줄 알고 여기서 내리라는 거지? 생각했는데,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이번 역에서 내리라고 했고, 버스 기사도 이번 역에 내리라고 했다. 종점인가?, 그러기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타고 있었다. 잠시 행동과 생각이 멈춰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내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내렸고, 버스는 그때서야 떠났다. 내가 내리지 않아 버스는 출발하지 못했다.


"너 블레드 호수로 가려면 여기서 버스를 갈아타야 해."

"내가 블레드 호수 가는지 어떻게 알았어?"

"ㅎㅎㅎ, 이 곳을 지나는 관광객은 거의 다 블레드로 가니까, 너도 그런 거 아냐?"


그렇게 나를 빼고 모두가 다 한통속(?)이었다. 이 곳을 방문한 동양인에게 소극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또 그들은 그들의 자리로 돌아가 애써 나를 모른척해 주었다.


버스 승객은 모두 백인. 동양인은 눈에 띌 수밖에..


그렇게 도착한 블레드 호수

블레드 성과 블레스 호수는 그야말로 동화 속 장면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사진 속 블레드 호수 한복판에 있는 교회는 전 세계 결혼식 명소로 이미 1년 치 스케줄이 모두 예약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평화라는 단어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냥 하루 종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을 곳이다.

그러나 여행을 다녀오고 한참이 지나 이 곳을 다시 떠올리면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자그레브에서 이 곳 블레드 까지 지나온 여정과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 금발 소년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더 쉽고 빠르게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세계를 즐기는 과정 아닌가. 일부러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평범하지만 모두가 가는 방법이 아닌 좀 다른 방법으로 택하니, 특이하지는 않지만 나만의 특별한 기억이 남는 여정이었다. 블레드 호수만큼 아름다운 사람들로 기억된 여정이었다.


과정을 여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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