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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비 Apr 06. 2023

평생 믿어온 신념이 흔들릴때

<레미제라블>과 <클루지>



"너 같은 놈은 결코 변하지 않아." 영화『레미제라블』에서 경감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한 말이다. 가석방 중에 도망친 장발장은 새 사람이 되어 한 도시의 시장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베르에 눈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죄수 장발장만을 볼 뿐이었다.



어느 날 장발장을 쫓던 자베르가 시민 혁명군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자베르와 마주친 장발장은 그를 죽일수도 있었지만 살려준다. 마치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었던 신부처럼. 그 일이 있은 후 자베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그는 법과 정의만을 외치며 살았다. 그에겐 자비란 없었다.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나누고 그 신념을 성실히 따르며 살았다. 그런데 결코 변하지 않을 악인이라고 믿어왔던 장발장이 자신이 믿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내면에 혼란이 일어났다. 평생 굳건히 믿어온 신념이 흔들리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10년 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자베르가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된다.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갤리온 펴냄)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불완전하고 오류 투성이이다. 그것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문제들이라고 한다.



자베르의 경우는 심리적 오류 중 하나인 '확증편향'에 사로잡혔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신념에 빠져 그와 반대되는 증거들을 모두 무시해버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심리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반대 증거가 나타나도 자기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틀린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쉽게 믿고, 한 번 믿은 것을 잘 바꾸려 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다. 이런 신념은 가정 불화와 종교 분쟁을 일으키고 전쟁 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과거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인 우생학자들이 그랬고, 가까이는 가수 타블로의 학력 위조 의혹 사건이 그렇다.





나에게도 그런 신념이 있었다. 지금은 무교지만, 과거 교회에 다녔을 때 부처님이란 존재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악'이었고 나는 '선'이었다. 어렸던 나는 권위 있는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성인이 되었다.



코로나를 계기로 마음공부란 걸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통해 부처님 '싯다르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과 다를 바 없는 인류애가 넘치는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인간의 고통을 보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하여 온 인류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며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다. 그것을 위해 왕의 지위를 버렸고, 자신을 신으로 받들라고 말한 적도 없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온 걸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을 판단하고 상처 준 일이 얼마나 많을까? 어떻게 그렇게 타인이 말한 것을 의심하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믿고 살았을까? 이 확증편향에서 벗어나는데 3~4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에는 정보가 넘쳐나고 그중에는 거짓 정보도 많다. 우리는 쉽게 속고, 쉽게 믿으며 균형 잡힌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한 번 믿은 것은 잘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 '클루지'에서는 비판적 사고기술을 배우는 것을 제시한다. 한 예로 10살에서 12살 아이들에게 철학에 관해 생각하고 토론하는 법을 가르쳤다. 수업을 받은 아이들은 언어지능, 비 언어지능, 자신감, 독립심에서 뜻깊은 향상을 보였다. 아이들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성찰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즉 메타인지를 높임으로써 세계에 대한 아이들의 이해를 의미 있게 향상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나는 철학을 통한 비판적 사고능력뿐만 아니라 문학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게 해 주어 생각을 유연하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베르와 장발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장발장은 신부의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성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해서 산다. 하지만 자베르의 경우는 그것을 거부한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생겨난 것일까? 살아온 삶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록 모두에게 비참한 시대였지만 장발장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을 위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빵을 훔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반면 감옥에서 태어나 정의만을 외치며 살아온 자베르는 사랑(자비)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보인다. 처음 받아 본 장발장의 자비에 어찌할 줄 모른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 심지어 자신에게까지도. 만약 어린 시절 가정과 사회에서 그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면 책에서라도 간접 경험해봐야 안다.



그 부분에서 문학이 도움이 된다. 인간은 모방하면서 배운다.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감정을 느끼면서 변화한다. 그가 비록 가정에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책을 통해서 한 번이라도 그런 감정을 느꼈더라면, 인간의 다양한 면을 경험했었더라면 그의 신념이 유연하게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레미제라블'의 뜻은 비참한(불쌍한)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장발장이 아닌 자베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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