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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30. 2023

현실과 상상 사이로 그어지는 곡선을 이해하려는 노력

EIS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더욱더 안정적인 곳을 향하여 아래로 더 아래로 떨어져 가던 세상 속 구성원들이 거의 대부분 도달한 위치에 만족했을 때,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시작한다. 질문의 진폭에 놀라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박차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자극을 주고, 그것에 대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관찰한다. 높은 주파수에서 낮은 주파수로 대화의 다이얼을 돌려가면서 대답 속에 담긴 내용이 질문의 뜻에 뒤따라오는지, 앞서가는지, 아니면 정확히 들어맞는지를 기록한다. 돌아오는 말에 따라오는 출력 값의 세기가 질문에 담긴 입력 값의 세기에 비해 얼마나 더 강한지를 살핀다.


실험을 처음 시작할 때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믿을만하지 못하다. 주파수가 지나치게 높을 때 돌아오는 대답과 질문 사이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Kramers-Kronig Validity Test를 행했을 때 출력되는 오차 값이 허용되는 범위 밖에 있다. 현실 (ReZ)과 상상 (-ImZ)이 서로 직각을 이루어 교차하는 사분면 위에 대답이 자기 멋대로 찍히고, 그것을 서로 연결하는 선들이 서로 엉켜 난장판을 이룬다.


주파수가 수백 kHz 보다 아래로 떨어지면 이리저리 날뛰던 대답들이 점차 제자리를 찾는다. 측정할 수 있는 신호의 강도가 증가하여 노이즈를 뚫고 나온다. 대답에 담긴 내용의 현실적인 면과 공상적인 면 모두가 증가하다가 완만하게 아래쪽 현실로 꺾여서 첫 번째 반원을 만든다. 출발점이 어딘지 도착점이 어딘지 관계없이 그저 앞으로 또는 뒤로 움직이는 것만이 목적인 부분에서 처음으로 해석 가능한 신호를 내보낸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다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지나쳐가는 동안 그저 순탄하게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주파수가 중간 부분을 지날 때, 세상 안에 있는 그 모든 비이상적인 것들이 그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한 것처럼 보였던 구성원들이 질문의 주파수에 맞추어 다른 곳들을 향해 몸을 던진다. 출발점에서 바깥으로 발을 내딛을 때 드는 조바심, 그리고 길 끝에서 도착점으로 들어갈 때의 아쉬움이 서로 그 몸을 맞댄 채 한데 엉킨다. 낯선 풍경들을 지나쳐가고, 부서지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장애물들을 비껴가며, 세상 밖에서는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는 그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통과하여 어딘가 다른 곳으로 움직여간다. 서로를 밀치며 비집고 들어가는 것들이 자신과는 다른 것들에게 더 많이 저항할수록 더 큰 반원이, 더 적게 저항할수록 더 작은 반원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대답을 들었을 때 이미 하나하나 그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구분되는 반원들이 나타날 때도 있고, 반원들이 서로 포개어져 분리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실험의 막바지, 주파수의 주기가 1초를 넘어갈 때, 아직 출발하지도 않은 것들 또는 이미 도착하여 늘어져버린 것들이 신호를 따라 느릿느릿하게 몹시 큰 목소리로 대답을 내어준다. 물론 이토록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나에게 그럴만한 여력은 없다. 그런 목소리에 집중하였다가는 주파수의 다른 부분에서 나온 신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길고 긴 대답을 끊어내어 실험을 멈춘다.


마침내 데이터를 해석할 시간이 온다. 앞을 가로막고, 움직임을 얽매며, 쌓여서 넘어가지 못하는 것들에 수식과 기호를 대입하여 이름을 붙인다. 서로 평행하게, 또는 연이어 늘어놓아 이론을 만든다. 요소 하나하나에 숫자를 대입하고 근사 알고리즘을 실행한다. 실험에서 얻은 대답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는 곡선과 내가 짜낸 이론이 제법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진다면 성공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론에 포함시킨다면 어떤 식으로든 실험값을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충분히 적은 기호들, 그리고 내가 경험한바 안에 있는 것들로 이론을 짜낸다. 숫자를 바꾸어가며 알고리즘을 계속 실행한다. 


이론은 세상 속에 있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값을 내보내준다. 오차가 전혀 없는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이론으로 억지로 설명하려는 이 시도에는 애초부터 명백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세상의 특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현실과 상상 속에서 그어지는 이 곡선 (Nyquist plot) 안에 있다. 그 모든 이상적인 면들과 비이상적인 면들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이론에 입력할 어림값을 조금씩 바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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