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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규모의 미학

서울시무용단 <일무>

by 김태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쉬운 일이라도 여럿이 힘을 합한다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우습게도, 종이책을 만드는 편집자는 이 속담을 듣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바람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하얀 종잇장, 이 백지장은 맞들면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 된다. 뭐든 잡기 쉽고 가볍고 작아질수록 사람들의 선호를 얻는 지금, 빽빽하고 두툼해서 그 무게가 상당한 책이 기피 대상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낱낱이 겹친 종이 한 장 한 장의 가치가 모여 한 권의 지식이 완성된다는 것을.


춤을 이야기하면서 속담을 먼저 떠올린 것은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반듯하고 나란하게 모여 동등한 크기로 재단된 종이를 보면서 발레 <백조의 호수> 속 열을 맞춰 움직이는 백조들을 떠올리고,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빅 댄스(Big Dance)를 회상하며, 탄성을 자아내는 아이돌의 칼군무까지 생각이 가닿는다. 이쯤 되니 백지장만 아니라 뭐든 맞들면 낫다 싶다.


춤에서도 규모가 곧 작품의 완성도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물며 목적을 가진 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19세기 후반 제작된 병풍에 묘사된 종묘제례의 모습에서 마치 복사/붙여넣기된 것 같은 무(舞)원들의 모습을 보며 여럿이 함께 추는 춤, ‘군무’의 뿌리를 발견한다.


‘줄을 지어 추는 춤’이라는 의미를 가진 일무(佾舞)는 회례연과 제례에서 줄과 사람의 수가 가로세로로 동일하게 열과 행으로 벌려 서서 예를 갖춰 추는 춤이다. 一舞가 아니라 佾舞인 것이 상기할 부분인데, ‘佾’이라는 한자에는 그 자체로 ‘춤 줄(춤을 출 때 늘어선 줄)’이라는 뜻이 있다. ‘사람 인(人)’ 변에 ‘음악(音)’과 ‘몸(⺼)’이 합쳐진 글자다. 글자 그대로 춤을 위한 춤, 군무를 위한 군무인 셈이다.


오늘날 종묘제례에서 추는 일무가 대표적으로 알려졌지만, 본래 회례연에도 일무가 존재했다. 각종 연향에 등장하는 정재와 달리 국가 질서를 다지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사 의식에 수반된 춤이니만큼 일무는 공연을 위한 작품으로서의 춤이라기보다 군무로 여기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크게 문덕을 기리는 ‘문무’와 무공을 칭송하는 ‘무무’로 나뉘는 일무는 주재자의 지위에 따라 규모가 결정됐다. 천자는 8일무, 제후 혹은 왕의 경우 6일무, 대부(大夫, 정일품에서 종사품)는 4일무, 사(士, 대부 아래의 신분, 선비)는 2일무를 벌였다. 8일무라 함은 64명이 8명씩 8줄로 나열한 것이니, 그 규모가 자연스레 권력을 드러낸다.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한 후 8일무를 선보였는데, 이는 제후국의 예를 따르던 데서 황제의 격에 맞게 변화한 것이다.


『시용무보』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일무의 동작은 매우 단순했다. 반듯하게 서서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동작은 각을 만들고 절도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각각의 동작에는 이름을 붙여 의미를 강조했다. 일무는 그 규모로 하여금 예를 다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춤이었다.


왕조 시대가 저문 뒤에도 일무는 존재했다.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동서 냉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분단국가에서 열린 세계인의 경기 대회였다. 그전까지 열린 올림픽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어마어마한 행사였던 만큼 개회식 풍경 역시 가히 기록할 만했다. 창작 춤 <태초의 빛>을 위해 학생과 무용수 1,525명이 등장했고, 매스 게임 <어서오세요>에는 1,100명이 참여했으며, 전통 복식에 화관과 한삼까지 갖춘 1,450명 무용수가 단체로 <화관무>를 췄다. 이들은 오와 열을 맞춰 모두가 같은 동작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 동원된 사람의 수는 1만 5천 명이었다. 이념과 분위기가 달라도 국가마다 으레 반복되는 현상이다. ‘경이로운 영국’을 주제로 한 편의 뮤지컬처럼 벌인 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퍼포먼스에서도 이야기를 완성한 것은 결국 사람과 동작, 규모의 역할이었다.


오늘날 ‘줄지어 추는 춤’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안무에 깃든 줄거리는 없지만 도리어 그 끝에는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줄지어 추는 춤에서 동작 하나하나의 예술성은 조금 미뤄둬도 좋겠다. 추상적인 움직임의 반복 끝에 무대에 남는 것은 음악과 움직임이니. 이야기가 없는 춤, 추상성만 남은 움직임은 그래서 동시대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다. 반복될수록 의미는 지워지고, 규모가 커질수록 카타르시스가 폭발한다. 고아한 독무[一舞]가 아니라 군무[佾舞]가 전달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다.


*세종문화회관 매거진 [세종문화N] 2023 04/05월 5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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