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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가일 Apr 21. 2023

수치가 없어 답답한 우울증

하루하루가 예기치 못한 감정과 증상들의 연속

50%로 다음 달부터 일을 줄이면 좋아지겠거니 했다.


좋은 회사라 좋은 옵션도 먼저 제시해 주고 고맙게 생각했다. (물론 회사가 착해서가 아니라 기껏 트레이닝시켜 놓았는데 퇴사하면 골치 아프니 그런 거겠지만)


다음 달인 5월부터 50% 파트타임 근무를 한시적인 반년간만 하기로 하고 11월부터는 다시 풀타임으로 하자고 구두 합의한 바로 그다음 날.


전 날 내가 회사에서 가장 심한 패닉을 겪었던 걸 잊었던 탓일까.


50%로 하기로 했으니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오만함일까.


아님 파트타임 근무를 결정하면서 부득이하게 전년도 성과평가 (다행히 평가는 좋았다)와 올해 업무목표 설정을 팀장이 다 짜놓은 판에 서명만 했는데 50%를 하기로 이미 합의했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업무목표 때문에 나는 다시 부담을 받은 것일까.


목요일, 원래라면 출근하는 게 맞지만 양해를 구하고 홈오피스를 하기로 했던 어제.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2년 전 독일에서 얻은 첫 직장에 반년 좀 넘게 일하고 번아웃이 왔던 그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먹은 것도 없는 데 토했던 그날. 그날 이후로 나는 세 달가량 병가를 내고 결국 퇴사를 했었다. 문과생이 어쩌다 Senior IT consultant가 돼서 맞지 않는 업무와 코로나로 직접 만나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동료들, 그리고 리더 답지 못했던 팀장 등 여러 이유가 있어 온 번아웃+우울증이었지만...


지금 하고는 결이 다른 그때의 이유들.

하지만 어딘가 비슷한 지금의 이유들.


나는 그렇게 일어날 수 없었다.


침대에서 겨우 팀장에게 개인적으로 (Whatsapp)으로 오늘 내 상태가 안 좋아 오후에 근무를 시작해도 되겠냐고, 오전 내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양해메시지를 보내고 눈을 감았다. 몇 발자국만 가면 서재에 있는 내 회사가방에 회사노트북과 회사휴대폰이 있는데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몇 시간 뒤 팀장으로 부터 답장이 왔다.


    오전 내내 미팅이 너무 많아서 이제야 답장 줘서 미안해. 물론 오후부터 일해도 되지. 앞으로 이런 건 묻지 않아도 돼. 너에게 맞는 대로 해.


신뢰가 고마우면서도 내가 지금 업무를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는 게 너무 미안했다.


    그냥 농땡이 치고 싶은 거야? 그냥 일하기 싫니? 진짜 아프니?


나에게 묻기를 수십 번.


근데 그냥 농땡이라고 하기엔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내 몸이 눈물을 자꾸 밖으로 내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가 쌓여왔다는 것일까.


    뭐가 그렇게 많이 쌓였니.


어려운 업무들 때문에 그리고 언어적 부담감 때문에 어려운 현 회사생활. 물론 산업도 업무도 내게 딱히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내게 뭐가 맞는지 모르는 현 상태에서 여러 가지 현실을 고려했을 때 (거주지역, 대기업 네임밸류 및 복지, 고용안정성, 평균 이상의 보수, 서른세 살이 된 내 나이, 지금이 세 번째 직장, 모두 1년만 재직, 두 번째 중고 신입, 올해 늦어도 내년 내 임신 희망) 그냥 버티는 게 답이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1년은 버텼는데.


    정말 코로나 이후로 지난 4개월이 이렇게 된 거라고?


그렇다기엔 내 피검사 결과들은 다 최적이었다.


롱코비드라고 하기엔 증명할 방법이 없고 상담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우울증에 걸린 이유가 최소 8가지는 된다는 것이다. 일은 그중 하나이고 나의 스트레스를 최고로 만드는 트리거 역할을 할 뿐.


여기서 직장을 그만둬버리면 나는 어느 직장을 가든 또 같은 문제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나를 지난 6년간 봐 온 상담선생님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버텨보려고 했던 것이고 세 달을 버티다 안 돼서 병가+휴가 붙여서 바쁜 시기에 동료에게 양해 구하며까지 3주 반을 쉬고 왔는데...


돌아와서 첫 주 딱 3일 일하고 이렇게 몸과 마음이 파업을 해 버리는구나.


딱 한 가지 일만 한 시간 동안 겨우 어정쩡하게 해치우고 거의 반포기 상태로 그냥 노트북을 덮었다.


평소 시간관리에 철저하고 아웃룩 칼렌더에 내 일정과 부재중 알람도 철저하게 기록하고 팀장과 동료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나였는데 어제는 그냥 모든 걸 할 여력이 없었다.


    이래서 우울증이 무섭구나. 다 포기하게 되는 상태가 와 버리는구나.


그 전날 저녁 9시에는 잤는데 그렇게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내리 36시간은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오늘 금요일, 겨우 일어나 지난달 병가로 부득이하게 내가 요청하고 내가 취소해서 복귀하자마자 바로 다시 잡은 미팅을 겨우 해냈다. 30분간의 미팅이었는데 마케팅직군인 내게 유럽법 관련 내용이라 어렵고 독일어도 힘들었지만 (특히 상대가 박사출신인데 내가 아는 일부 Dr.의 특성상 업무와 직결되지 않은 본인 지식나열이 너무 길어져 힘들었다...) 다행히 업데이트 돼야 할 우리 팀에 필요한 자료는 미팅 시간 내에 업데이트되었고 팀장에게도 '나 오늘 일 했어요' 식의 보고를 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이메일을 처리한 후 시계를 보니 침대에서 기어나와서 겨우 일을 한지 딱 한시간이 지나있었다.


몸이 다시 저려왔고 눈물이 났다.


아 망했다.


이 모든 아픔이 수치로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납득이 될 텐데. 그럼 이 무기력과 눈물을 내가 나약해서, 게을러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휴가 갔던 열흘을 빼고는 거의 6주를 매일 울기만 하는구나. 그리고 안타깝게 증상들은 심해져만 가는구나.


나는 그렇게 다시 아무런 조치도 없이 노트북과 휴대폰을 덮어버리고 침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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