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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목 Jun 09. 2022

꽃갈피

 세 번의 졸업식을 지나왔지만, 나는 꽃다발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연이 세 번 반복되니 이쯤이면 내 인생에서 축하의 꽃다발을 받을 일은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자조적인 생각도 들곤 했다. 꽃다발은 내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어느 날부터 탐스런 꽃송이가 옹기종기 모인 것만 봐도 슬퍼졌다. 그 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문득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꽃다발은 완결성을 의미하는 일종의 상징물이었다. 양손이 휑한 졸업식은 어떤 것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를 바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내겐 떠나지 않는 좋은 추억으로 남은 꽃과 관련한 기억이 있었다. 두 번의 졸업식 이후, 그러니까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친구가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집에 가는 길에 꽃을 발견했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가로등 하나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친구는 그 속에서 용케 무언갈 발견한 듯 했다. 친구는 강아지를 길렀는데, 그 귀여운 말티즈를 닮아가는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다녔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마침내 어떤 것을 찾았는지 나를 향해 반갑게 돌아보며 외쳤다. “금목서야!”.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꽃 이름이었다. 하지만 친구에겐 익숙한 품종이었는지, 금목서에 관련한 일화를 줄줄 읊으며 내게 그 꽃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친구를 보며 막연히 꽃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 


 금목서를 보며 행복해하던 친구는 취업하고 조금 팍팍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해맑았던 친구는 사회인이 되었다. 싫은 일도 내색하지 못하고, 홀로 스트레스를 삭히며 가끔 내게 회사 일을 토로하는 그런 사람이. 나는 종종 친구와 대화할 때마다 과거의 금목서가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그때의 꽃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물어왔다. 우리가 살던 곳에 벚꽃이 피었느냐고. 나는 그 짧은 물음에서 친구가 느끼는 그리움을 알아챘다. 그래서 곧장 카메라를 켜 벚꽃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추억 속 꽃을 떠올리며 그리움을 느끼는 친구에게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사진을 보내며 나는 깨달았다. 친구는 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떤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게 꽃은 그저 트라우마였지만, 친구는 달랐다. 그녀는 꽃을 통해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어떤 동생한테 벚꽃 사진을 한 장 받았다. 그날은 숨 쉬듯 느끼는 자기혐오가 조금 심해진 날이었다. 먹먹한 마음으로 수업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를 향한 혐오로 귀결되는 결론을 맺는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필 창밖으로 벚꽃 잎이 휘날리고 있었다. 마음이 꽃잎을 따라 정처 없이 흩어졌다. 기분 또한 심해로 서서히 가라 앉고 있었다. 그랬던 날 곧장 수면 위로 끌어 올려준 것은 그 사진 한 장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사진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폴라로이드 사진 속 꽃잎이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예전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꽤 오래 잊고 있었던 봄의 향이 훅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내가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순간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삶은 딱 떨어지는 공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받음으로써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나마 나의 미숙함을 어떻게든 가려보고 싶었던 어린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꽃다발보다 값진 순간을 선물 받았다. 내가 모아온 기억들이 하나의 꽃다발이 되어 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꽃다발에 눈물로 얼룩진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마음들을 하나하나 갈피로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만나온 인연들처럼 꽃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 되새기고, 힘들었던 하루를 웃어넘기는 그런 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마음속에 꽃갈피 하나를 꽂아본다. 미래의 내가 감각할 꽃의 추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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