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팔기는 과학이라고 말하는 글을 읽었다. 확률적으로 7번의 실패 후엔 성공이 뒤따른다는 요지의 주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내 인생에서 7번의 도전을 거친 일이 있었던가, 고민했다.
24살의 11월. 고질병처럼 달고 살던 조울증이 악화됐다. 당시 나는 가을부터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마음은 어느 때처럼 담아 놓은 것 하나 없이 가벼웠고, 관성적으로 지탱하던 일상 또한 똑같았다. 어차피 어떤 순간도, 어떤 존재도 삶에 대한 의지와 욕구를 주지 못했다. 항상 그래 왔기에 그때의 헛헛함을 가벼이 넘겼었다. 그리고 그해의 11월, 내게 더 이상 삶을 견뎌낼 힘이 없음을 인정했다.
꽤 절박한 심정으로 병원엘 갔다. 의사 선생님은 사무적인 어조로 약을 늘려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빨간 약 하나가 추가된 약 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입 속에 털어 넣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 눈을 뜬 건 22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때의 나는 숙면을 취하지 못했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하루에 두세 시간의 수면이 고작이었고, 겨우 잠들어도 뒤죽박죽 현실과 망상이 혼재된 장면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잠을 자면서도 끊임없이 뇌가 활동하는 감각이었다. 겨우 잠이 들어도 한숨도 못 잔 것처럼 피곤했다. 자연스럽게 잠드는 것을 기피하게 됐다. 그랬던 내게 약이라는 새로운 도피처가 생긴 것이었다.
엄마는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잠만 자고 있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시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엄마는 나를 깨우지 않았다. 나는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에게 잠에 취해 겨우 인사하고, 다시 잠들었다.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우울증을 엄마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은 건 17살의 봄이었다. 엄마는 내게 정상적으로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23살의 여름에 몰래 병원에 다녀왔음을 고백하는 내게 엄마는 제발 정상적으로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했다.
24살의 나는 하루에 8개의 약을 먹고 있었고, 엄마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25살의 여름에 나는 유서를 썼고, 죽기에 적절한 장소를 탐색했다. 계획을 마무리하고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끈을 드디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홀가분했다. 엄마는 그런 날 보고, 요즘 내 마음이 편해 보인다며,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간접적인 고백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짧고, 아무런 꾸밈이 없었던 그 말은 염원이 담긴 주문 같았다. 나는 그 말 하나에 죽기를 포기했고, 지금껏 살고 있다. 드문드문 고난은 이어졌지만, 점점 다시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넘어질 때마다 나의 안정을 진심으로 행복해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이 귓가에서 되풀이될 때마다 힘 풀린 다리에 생명력을 부여하게 됐다.
나는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엄마가 토해내듯 뱉었던 그 문장을 듣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저 아무런 오해도 풀지 못하고 끝났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27살의 가을. 수백 킬로미터를 사이에 두고 엄마에게 고백했다.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둬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었다. 엄마의 걱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고 겨우 털어놓은 엄마에게 또 다른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 일어날 자신은 있었다. 나는 그때보다 단단해졌고, 엉망진창인 정리되지 않은 삶이라도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엄마는 포기해도 괜찮다며 내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걸어가며 문득 내 삶 자체가 칠전팔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게는 삶을 이어나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 아닐까.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삶을 지속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런 도전. 남들 같이 원대한 꿈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는 큰 시도일 것이다.
그날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 관문인 육교를 건너며 결심했다. 나는 장거리 마라톤을 주파하는 꼴찌 선수가 된 기분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언젠가 보일 완주선을 기다리며, 꾸역꾸역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