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이 아닌 유대를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브런치를 자주 이용한 건 아니지만, 마음의 밑바닥을 확인할 때면 꼭 방문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은 대부분 인생의 힘듦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내용이고, 텀 또한 들쑥날쑥하다.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사용하려 했던 건 아니다. 내가 브런치를 처음 알게 된 건 2020년이다. 당시 기억을 되살려보면 시험 삼아 넣은 글 하나가 바로 통과되며 얼떨결에 '작가'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계기는 어쨌든, 글을 가지고 해 본 나름의 시도 중 하나였고 신선한 자극이 되어 브런치를 활용해 무언가를 해볼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다만 그쯤(혹은 이전부터) 에세이라는 장르가 자기 연민으로 가득한 일기장과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고 느꼈다. 일반인도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쉬운 출간'을 앞세우며 홍보한 브런치 또한 예외는 되지 못했다. 그 흐름을 보며 아무래도 브런치에서의 연재물 모음이 그리 의미 있는 작업은 되지 않을 것 같아 접어두었다.
자기 연민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결코 스스로 급 높은 글을 쓴다고 여기는 오만함이 아니다. 단순 합산하면 10년보다 20년에 가까운, 인생 절반을 넘는 시간을 우울증, 조울증과 함께 싸워온 입장에서 글을 통해 자기 연민에 빠져 드는 게 얼마나 쉽고, 자각이 어려운 일인지 스스로가 알고 있어 감히 단정하는 것이다.
물론 글을 통해 무언가를 치유하려는 행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목적으로 글을 접하게 되었었고. 다만 개개인이 모여 만들어낸 주류(로 느껴지는) 흐름이 어찌 보면 마이너한 장르로 흘러간 상황이고, 우수수 쏟아지는 글 또한 영양가 없는 싸이월드 포도알 얻기용 다이어리와 다를 바 없었다. 에세이라는 장르에 오명을 남기는 짓에 숟가락 얹고 싶지는 않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오만한 것 같아 조금 해명한다면, 나는 병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스스로를 '불행한 어떤 것'으로 여기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한다. 이미 왜곡된 필터를 장착한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고삐를 느슨히 하면 그야말로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 미친 인간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회적임의 기준에 과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강박과도 닮은 행위다.
각설하고 자의식과잉 같이 이런 글을 이 새벽에 쓰고 있는 건 직전에 올린 번개탄이 어쩌고 하는 글을 해명하고 싶어서다. 위에서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잘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 (오랜만에 긴 글을 쓰니 맥락이 도통 이어지지가 않는다)
조금 더 정리하면, 이 브런치는 내 전용 대나무숲이다. 올라오는 글 또한 누군가에게 딱히 공감을 바라고 힘든 사람끼리 모여보자는 의미로 쓴 글이 아니다. 그저 내 인생의 페이지 중 일부고, 다음에 추억팔이하며 내가 이런 글을 썼었지, 이때 그런 일이 있었지 이 정도로 사용할 뿐이다. 이런 글이 민감한 키워드 검색을 통해 유입을 부르고, 어떤 생각과 결심을 강화하는 용도로 쓰이게 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앞의 글도 이 글이 올라간 직후에 비공개로 돌릴 예정이다. 변명이지만 방치하는 곳이라 이만큼 검색 유입이 많은 것도 몰랐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스운 게 최근의 나는 글이라는 매개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쇼츠에 잠식된 뇌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글로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다. 쏟아내고 싶은 감정과 순간이 더 이상 포착되지 않는다. 관성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펜을 드는 것,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 자체도 노동의 일종으로 느껴진다. 이 말은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의 순수한 열정이 죄다 사라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글로 완성하고 싶은 이상도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할 건 없다. 나는 쉽게 질리는 사람이고 그럴 때마다 항상 재빨리 다른 것을 찾아 떠나니까. 오히려 글이라는 것을 이만큼 붙들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 글을 보게 될 몇 없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이곳에 올라오는 글들에 대해 막연한 감정이입을 바라지 않는다. 앞선 글을 포함한 내 브런치의 모든 글들은 나의 단상일 뿐이며, 압축된 하나의 이야기에서는 단면밖에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왜곡되게 다가가는 것이 나의 자질 부족인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럴 때마다 마음 한켠에 자리한 불편함이 존재감을 키운다.
애초 내가 글을 통해 시현하고 싶었던 것은 공감의 언어, 단 하나였다. 사랑의 순간을 담은 글, 위로를 담은 글, 쉼터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니 내 글에 담긴 미약한 유대의 고리를 느껴준다면, 그걸로 일상의 짧은 순간을 공감하고 지나가준다면. 그것만큼 감사할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