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보지 않는 것을 고치려다 망가지는 것들

by HONG


#0. 1픽셀의 우주


예전에 디자이너로서 일할 때의 기억이다

모니터 앞에서 픽셀 하나를 0.5 아니 0.1만큼 더 옮겨보았다.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다, 다시 원래 자리로. 그래도 뭔가 아쉽다. 다시 0.3만큼만.


“이제 어느 정도 된 것 같아. “


그렇게 중얼거리며 저장 버튼을 눌렀던 순간들이 있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나는 진심으로 그 차이를 느꼈다고 생각한다.

0.1픽셀의 차이가, 2%의 투명도 조정이, 1도의 색상 변화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완성도의 차이를.


그런 시간들이 쌓여 완성된 작업물을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할 때면, 나는 은근히 기대했다. “아, 이 부분 정말 디테일하게 잘 나왔네요”라는 말을, “여기 이 미묘한 차이가 느껴져요”라는 반응을.


#혼자만의 감동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비슷했다.


“네, 좋네요.”

“깔끔하게 잘 나온 것 같아요.”

“예쁘게 해 주셨네요.”


그뿐이었다.


내가 밤새 고민했던 그 섬세한 조정들, 완벽을 위해 수십 번 되돌렸던 그 변화들은 그들에게 그냥 ‘괜찮은 그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눈에는 천지 차이였던 before와 after가, 그들에게는 그냥 똑같은 그림이었다.


처음엔 속상했다. 내 노고를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점점 깨달았다. 이건 그들이 둔감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내가 혼자만의 기준으로 완벽함을 정의하고 있었던 거라는 걸.


#확대된 세계의 함정


세상은 내 모니터만큼 확대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집착했던 그 미세한 디테일을 찾기 위해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체적인 느낌이, 첫인상이, 직관적인 이해가 더 중요했다.


그제야 이해했다. 내가 추구했던 완벽함이란 사실 나만의 자기만족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자기만족이 나쁜 건 아니라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작업 그 자체보다 ‘완벽하게 작업하는 나’에게 취해있었던 것 같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전문가로서의 자아에, 남들이 놓치는 것까지 보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나 자신에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 그림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지,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가. 0.1픽셀의 차이보다, 2%의 투명도보다, 1도의 색상 변화보다 중요한 것들이.


#뒤바뀐 완벽주의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 시절보다 훨씬 허술하다.


모든 것이 실수투성이고, 완벽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고 있다. 일도 대충, 관계도 대충, 심지어 밥도 대충 먹는다. 그 시절 0.1픽셀에 목숨을 걸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그냥 ‘어느 정도만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산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그 완벽주의자가 도사리고 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놈이 고개를 든다. “아직 준비가 안 됐잖아.”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시작해야지.” “이 정도 실력으로는 안 돼.” 그러면서 시작조차 못 하게 막는다.


#완벽한 핑계의 완성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준비가 부족하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포장해서.


이상하지 않나. 예전에는 이미 90% 완성된 작업에서 마지막 10%의 완벽함을 위해 밤을 새웠는데, 지금은 0%에서 시작하는 것도 무서워한다. 완벽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 결국 나를 완벽한 무기력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예전에는 완벽주의가 나를 인정받지는 못했어도 내 눈에는 더 나은 결과물로 이끌었다면, 지금의 완벽주의는 나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고정시킨다. 완벽할 수 없으니 아예 하지 않는 것.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니 도전하지 않는 것.


#모순의 완벽한 구현체


허술한 현실과 완벽을 요구하는 내면. 이 모순적인 조합이 만들어내는 건 결국 더 큰 게으름이고, 더 깊은 무책임함이다.


“모순이라는 형태의 완벽한 화신이자 구현체”


그게 지금의 나인 것 같다.


완벽하게 불완전하고, 완벽하게 일관성이 없는. 그런 인간으로서 완벽하게 자조하며 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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