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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오늘 Jul 03. 2023

거짓의 비의도적 혼동 속에 진실을 가려내는 재미

<라쇼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민음사 북클럽 에디션)




<민음사 2023 북클럽 에디션>













덤불 속-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덤불 속은 어두운 풀숲에 남자가 죽어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자백, 심지어는 무녀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신을 발견한 나무꾼, 죽은 사내와 마주친 유랑 승려, 도둑을 포박했던 방면(검비위사의 하수인), 노파.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수록 사건의 내막은 점점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도둑, 다조마루와 두 남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간단해 보였던 이야기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는 거짓을, 아니 모두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아 미궁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그것들을 드러내기를 무의식적으로 피하기도 하고, 의식적으로 감추기도 한다. 그래,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가 겪은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최대한 객관적인 척, 언제나 진실만을 말했던 것처럼 뻗대며 살아갈 뿐이다. 다만 덤불 속」 이야기처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겪은 인물들이 설파하는 진실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면 우리는 무엇을 진실이라 믿어야 하는가.


어쩌면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가 바라보는 진실은 언제나 객관적 사실과는 무의미하니. 살인 사건이라는 점만 다를 뿐 여전히 우리는 손쉽게 상대방의 마음을 곡해하고 주관적 경험을 언제나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나.  덤불 속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현실과의 괴리는 점점 옅어져간다.


 이렇게까지 인간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단편 소설이 또 있을까?

『라쇼몬』에는  타인의 불행에 대한 모순된 감정을 다룬 충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죽」,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며느리와 사는 시어머니의 남모르는 괴로움을 그려낸 「흙 한 덩이」, 그 외에도 거미줄, 두자천 등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짤막한 이야기임에도 세상만사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3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만약에 작가가 조금만 더 긴 생을 살았다면. 계속 이야기를 써나갔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에 무의미한 상상을 해본다.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타인의 불행에 동정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불행을 어찌어찌 빠져나오게 되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뭔가 부족한 듯한 심정이 된다. 조금 과장해 보자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려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리하여 어느 틈엔가 소극적이기는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일종의 적의를 품게 되는 것이다. 큰스님이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불쾌한 기분을 느꼈던 이유는, 이케노오 승속들의 태도에서 바로 그런 방관자의 이기주의를 자기도 모르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p.53 '코'








 큰스님은 황급히 코로 손을 가져갔다. 손에 닿은 것은 어젯밤의 짧은 코가 아니었다. 윗입술의 위쪽부터 턱밑까지 대여섯 치나 늘어져 있던 옛날의 기다란 코였다. 큰스님은 코가 하룻밤 새 다시 원래대로 길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코가 짧아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가분한 기분이 어디선지 모르게 되돌아온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됐으니 다시는 아무도 비웃지 않겠군.' 큰스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신에게 속삭였다.

p.55 '코'









 하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은 간혹 충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욕망을 위해 일생을 바쳐 버리기도 한다. 그것을 어리석다고 비웃는 자는 필경, 인생에 대한 방관자에 불과할 것이다.

p.67 '마죽'









 스미는 그 후 삼사 년 동안 묵묵히 고생을 견뎌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창 일할 때인 말과 어쩌다 같은 명예를 매게 된 늙은 말이 경험하는 괴로움이었다. 

p.116 흙 한 덩이









 스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손자는 그녀의 바로 옆에 천진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스미는 그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점점 이런 자신을 한심한 인간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또한 그녀와 악연을 맺은 아들 니타로라든가 며느리 다미 역시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변화는 금세 구 년간의 증오와 분노를 밀어냈다. 아니, 그녀를 위로하고 있던 장래의 행복조차 밀어내 버렸다. 그들 세 명의 모자는 하나같이 한심한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오직 하나 살아서 창피를 당한 그녀 자신이 가장 한심한 인간이었다. "아가, 너는 왜 죽었니………?" 스미는 무심결에 입속말로 이렇게 신불(神佛)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p.123 흙 한 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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