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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fulmito Mar 04. 2023

휴직하면 하고 싶었던 일

교사라는 직업 때문에 제한되는 일이 있을까? 글쎄... 요즘 젊은 교사들은 그런 생각은 덜 한 것 같긴 한데, 휴직을 하면 독특한 색으로 염색을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그레이는 어떨지? 카키는 어떨지 고민했다. 하지만 평생 염색을 잘하지 않으니 그 색깔들이 내게 어울릴지는 의문이다.


휴직 2일 차 오전 11시 미용실을 예약해 두었다. 색깔을 정하지는 못하고 고객에는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상담을 잘해 준다는 미용실을 예약해 두었을 뿐이다.


여행 여파로 아직까지 시차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나는 밤을 거의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늦잠을 자고 말았다. 비몽사몽간에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아침식사는 남편 담당이라) 다시에 침대에 몸을 누인 후 일어나질 못한다. 알람을 맞추고 끄고 맞추고 끄고를 반복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후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한다.


시내에는 주차해 둘 곳이 잘 없으니 버스를 타겠다고 나름 일찍 집을 나섰는데 13분 후에 도착한다던 버스의 시간이 제대로 줄어들지를 않는다. 20분이 지났는데 아직도 버스는 7분이 남았다니!! 이 버스를 탔다가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다. 아무 버스나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려는데 앞서 많은 버스들을 보내버린 덕에 지금부터 가장 버스는 애초에 내가 기다리던 그 녀석뿐이다.


이 버스를 타고 보니 왜 그렇게 늦게 왔는지 알만하다. 정중하게 손님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하시는 기사 아저씨가 무척이나 여유로우시다. 난 바쁜데 말이다. 내가 타려던 지하철을 타기도 빠듯하겠고 그 지하철을 놓치면 10분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 한 코스 전에 내려서(신호등 한 번을 더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마구 뛰기 시작했다. 겨우 염색하는 것 때문에 아침부터 이렇게 뛸 일인가. ㅋㅋ 약속시간을 지킨다는 게 내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슈퍼 파워를 사용한 덕분에 시간 맞춰 미용실에 들어섰다. 휴직했을 때 조금 튀는 색깔로 해 보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담당 디자이너분께서 내가 얘기하는 색깔들은 별로 권하지 않으신다. ㅋㅋ 그렇게 애쉬브라운으로 결정.


2시간 동안 갖은 약품들을 머리에 바르고 씻어낸 후 머리 손질을 마치고 으레 껏 " 머리 마음에 들어요."라는 멘트까지 마무리하고 미용실을 나섰는데, 너무 무난한 색깔이라 살짝 실망스럽다. ㅎㅎ 야심 차게 계획한 것에 비해 너무 평범하잖아. 이런 머리라면 근무하는 중에 열 번 스무 번을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구. 그러면서 앞으로는 계속 이 색깔로 염색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결국은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변덕스러운 내 마음 같으니라구.


집에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날씨가 따뜻해서 오늘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려도 좋을 것 같다. 겨울 내내 그림 그릴 장소 찾느라 카페에 돈 많이 갖다 날랐는데, 휴직도 했으니 긴축 재정을 시작해야 할 필요도 느낀다. 그림 그리기 좋은 곳들을 찾으며 집 방향으로 걸어오는데, 딱 좋은 벤치들에는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기 일쑤다. 그러다 꽤 걸어 좋은 자리를 찾았을 때는 화장실이 가고 싶다(야외에서 그리기 전에는 화장실부터 다녀와야겠군). 지하철 화장실을 사용한 후부터는 앉아서 그림 그리기 좋은 장소가 영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니 너무 멀리까지 걸어와버렸군. 이러다 그림도 못 그리고 집에 도착해 버릴 것 같다.


어느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마음에 드는 풍경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림 그릴 날은 많으니 100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 장소를 지키기로 한다. 봄햇살을 받으며 그림을 그린다. 매일 해도 지겹지 않은 행위다. 죽는 날까지 꾸준히 유지하고 싶은 내 취미활동. 지치지 않게 욕심부리지 않고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케치를 하다 보니 배가 고프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먹지 않았군. 채색은 집에 가서 해야겠다며 정리를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내가 엄마에게 해드릴 수 있는 효도는 자주 전화를 드리는 일이다. 내가 여행 간 동안 허전하셨을 테니 집에 걸어가는 길 엄마의 이야기를 마음껏 들어드린다. 올해 휴직하는 동안 내가 또 많이 하고 싶은 일이 엄마와 어머님을 자주 모시고 다니는 일이다. 엄마가 어느덧 나와의 여행을 추억으로 먹고 사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더 나이가 드시기 전에 많이 모시고 다녀야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에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또 행복하게 한다.


행복하게 잘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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