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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티제 Nov 06. 2023

코어근육에 대한 고찰(feat. 맹장수술)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회복실에서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몸 위에 덮인 포근하고 묵직한 이불과 그로 인한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온기였다. 수술을 하고 나온 게 아니라 잠시 어딘가에서 곤한 낮잠을 자다 깨어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찌를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이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그 통증은 더욱더 날카로워져 갔다. 마취가 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전날 늦은 오후에 시작된 복통이 새벽까지 가시지 않자 응급실로 향했다. 평소 위장의 증상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덕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검사 끝에 급성 충수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a.k.a. 맹장염) 수술방은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열렸고 대기와 수술을 거쳐 마취에서 깨어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복통이 시작된 지 정확히 스물네 시간 만이었다.


   지난여름, 근력을 기르기 위해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입문은 1:1 수업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체험 수업을 받은 강사님께서 이 동네에서 본인보다 더 잘 가르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던진 말에 백만 원 가까운 금액을 수업 후 곧바로 시원하게 결제했다. 그 선택은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 명예의 전당에 올리기로 한다.


   강사님은 나에게 코어근육이(이하 코어) 좋다고 했다. 코어로 움직이는 이런저런 동작을 시켜보시더니 곧잘 따라 하는 걸 보며 회원님은 코어를 타고났다며 왜 운동을 진작 하지 않았냐고 했다. 비교적 약한 허벅지 안쪽 근육과 팔의 힘을 길러주는 운동이 주를 이뤘다. 종종 코어운동을 할 때면 그야말로 배가 찢어지는 것 같은 강도로 운동이 진행됐다. 그래도 나는 그 고통에 희열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단련한 근육이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회복실에서 삼사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 누워있던 침대째 병실로 옮겨졌다. 이동을 도와주시는 기사님께서는 내가 누워 있던 침대를 병실 침대 옆에 붙이고 두 침대의 높이를 수평으로 조절해 주셨다. 이불을 끌어가시려나 들어주시려나 고민하던 찰나, 기사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들고 옮겨주면 더 아프다고 직접 움직여 이동해 볼 수 있냐고 물으셨다. 동공지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번째 관문은 침대 옮겨가기. 첫 번째 퀘스트인지라 기사님의 친절한 힌트가 주어졌다. 팔 힘을 써서 상체를 들고 엉덩이에 힘을 줘서 들어 올리며 조금씩 옆으로 움직여보라고 했다. 배우지도 않은 코어근육을 써서 쌀 한 가마니 그냥 옮겨버리는 나란 사람. 그런데 배에 힘을 주지 않고는 어떻게 움직이나요? 그래도 나는 필라테스 수련자다. 강사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팔과 엉덩이에 힘을 넣어봤다. 됐다. 배에 힘을 주지 않고도 몸을 띄울 수 있었다. 기사님의 칭찬이 들려왔다. 첫 번째 관문 통과!


   마취가 깨면서 시작된 생살을 찢는 통증은 병실에 올라와 다급히 진통제를 달자 서서히 참을만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남은 통증들은 고스란히 느끼며 움직여야만 했다. 그것이 회복에도 좋을 터였다. 진통제는 6시간을 간다고 했다. 투약 간격을 맞추기 위해 약발이 떨어져도 대기해야 하는 때에는 고통을 조용히 참아내야 했다. 새벽녘 진통제 링거를 들고 병실로 들어오시는 간호사님의 뒤에 후광이 비췄다. ‘감사합니다’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두 번째 관문은 침상에서 상체 일으키기. 맹장수술 후 가스가 나와야만 먹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환자의 증상에 따라 다른지 나는 바로 물도 흰 죽도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무엇도 먹힐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 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상체를 일으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두 번째 퀘스트는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다. 트랜스포머처럼 움직이는 침대 리모컨을 눌러 적당히 참을만한 통증이 느껴지는 구간까지 상체 부위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성공. 보너스는 오아시스 같은 물 한 모금.


   수술이 끝난 지 다섯 시간이 지나기 전에 소변을 봐야 한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내장도 마취가 풀린 걸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세 번째 관문은 꽤 난이도가 높았다. 먼저 시뮬레이션을 해 봤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다리를 침대 아래로 빼고 앉는다. 다음은 몸을 세워 두 발로 선 뒤, (심호흡) 화장실까지 걸어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장실에 들어가 다시 앉고, 일어나야 한다.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팔로 침대 난간을 세게 붙잡고 상체를 일으켜 회전시켰다. 등 운동을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보기에도 안쓰러운 팔이 후들거렸다. 다리를 하나하나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일어섰다. 모든 동작에서 명심해야 할 단 한 가지, 최대한 배에 힘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의 필라테스력이 발휘됐다.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괴로운 세트 마지막 동작을 유지하라는 지령과 함께 숫자를 ‘하나아~ 두울~’ 천진난만하게 세시던 강사님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랐다. 강사님, 보고 싶어요. 이제부터 앉고 일어서기는 인지로 가능할 것 같았다. 배에 힘을 주지 않는 스쿼트 자세다. 됐다. 세 번째 퀘스트도 클리어였다.


   그동안 일상생활을 할 때 몸의 어떤 근육을 어느 정도의 강도로 사용하는지는 전혀 생각할 일이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균형이 깨어지는 상황에 직면하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각 부분의 역할이 뚜렷하게 인지됐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 몸만이 그러할까. 이박 삼일 내 곁을 지켜줬던 가족들도, 스물네 시간 잠들지 않는 병원도, 그리고 이 사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고전12:22-23, 우리말성경]

22 이뿐 아니라 더 약해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오히려 중요합니다.

23 그리고 우리가 몸 가운데 덜 귀하다고 생각되는 지체들을 더 귀한 것으로 입혀 주어 우리의 볼품없는 지체들은 더 큰 아름다움을 갖게 됩니다.


[1 Corinthians 12:22-23, NIV]

22 On the contrary, those parts of the body that seem to be weaker are indispensable,

23 and the parts that we think are less honorable we treat with special honor. And the parts that are unpresentable are treated with special mode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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