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릴라 Jul 17. 2021

내가 정성을 안 들여 키워서 그렇겠지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일흔의 남자가, 다섯 살 때부터 혈육들에게 받은 아픔을 이야기하며 흐느낀다. 다섯 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못이 깊게 박혔고, 갈수록 깊어져서 여태껏 꺼내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혈육들은 다 죽고 혼자 남아서 남을 붙잡고 흐느낀다. 내가 물어봤다는 건 핑계다. 울고 싶었던 거다.

최현숙, <할배의 탄생>   


 남자 노인의 인생을 구술생애사 최현숙이 기록한 <할배의 탄생> 읽으면서 자꾸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번도   없는 노인의 인생을 이렇게 열심히 읽고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부모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부모님의 인생에 대해서는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조각조각 건성으로 들은 게 전부다. <할배의 탄생>을 읽듯이, 나도 엄마, 아빠의 인생을 읽고 제대로 알고 싶어 졌다. 부모님에게는 인생을 정리하고 해석해보는 시간이, 나에게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을 인터뷰하고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엄마를 인터뷰하기 위한 질문과 그 방법이 소개된 <디어 마더>라는 책을 주문했다. ‘책이 오면 잘 읽고 엄마, 아빠한테 인터뷰하자고 해야지. 누구 먼저 할까? 언제 하지? 좋아하시겠지?’ 이런 생각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엄마가 이사를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내가 사는  가까이로 이사를 오겠다고 했다. 지금 하는 일을 정리하고 늦어도 내년 5월까지는 이사를 해서 손주를 봐주겠다고 했다. 나는 당황해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화가 났다.  이런 일을 나에게는 의논을 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느냐고 나는 아이를 봐달라고  적이  번도 없다고 했다. 엄마는 니가 오지 말라고 하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생각해보라고 했다.


엄마와 전화를 끊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눈뜨면 생각하고 다시 눈뜨면 또 생각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엄마는 상처 받았겠지. 하지만 엄마는 왜 늘 내 의견이나 마음은 물어보지 않는 거지? 나는 왜 엄마가 가까이 온다는 데 부담스럽기만 할까? 이기적이고 못돼먹어서 그런 걸까? 엄마가 나에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걸까?’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누가 잘못한 건지.     


여기저기 물어봤다. 성인이 된 자식과 부모는 거리가 있는 게 좋다고도 했고, 어서 엄마에게 사과하라고도 했다. 애가 크면 봐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왜 그랬냐고도 했다. 5일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내가 정성을 안 들여서 키워서 그렇겠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사 먹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나에게 마음이 좀 풀렸냐고 물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가 성격이 급하고 경솔해서 그런 거라고, 너를 무시해서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 그것도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 딸인 나를 너무 몰랐던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네가 좀 불편하다. 둘째가 그러더라. 언니가 그렇게 무섭냐고. 네가 큰 자식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네가 좀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한테 말하니까 다들 큰 자식은 그렇다더라. 그리고 니가 그러는 건 내가 정성을 안 들여서 키워서 그렇겠지. 내 자식인데 누굴 탓하겠노. 지금까지 이렇게 산 거 그냥 이래 사는 거다. 그런 거지 뭐.


마지막 말은 내가 엄마가 이사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엄마가 내린 결론인 것 같았다. 엄마가 정성을 들이지 않고 나를 키웠다는 건 거짓말이다. 가난한 살림에 나를 비싼 사립 유치원에 보냈던 것은 아직도 엄마의 자부심이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얼마나 빨랐는지에 대해 말할 때 엄마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사는 게 힘들었던 때 큰 딸인 나는 엄마의 위로이고, 희망이고 자부심이었던 걸 안다. 엄마 나름의 최고의 정성으로 나를 키운 걸 나는 안다. 그런데 나는 왜 엄마와 가까이 사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럽기부터 한 지는 모르겠다.       


불편하다고 고백했다



이번 일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지를 짐작하기에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고 시원한 마음도 든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 말고, 진짜 내 속마음을 말한 것 같아서 홀가분하다. 나는 엄마가 불편하고, 엄마는 내가 불편하다는 진짜 마음을 서로에게 고백했다는 것이 좋기까지 하다.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 혹시 이번 일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살짝 된다.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딸이라 그런 거겠지만.   

  

지금까지 나는 엄마를 원망하고, 그 마음을 글로 쓰면서 언젠가는 엄마가 진짜 내 마음을 알아봐 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억지웃음이나 예의 차린 말 말고 싸우더라도 진짜 마음으로 관계 맺기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에서 작가가 거식증에 걸려 뼈가 튀어나오고 해골 같은 자신의 몸을 일부러 엄마 앞에서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뼈를 드러낸 채 거기 서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방식으로 내 몸의 모습이 어머니에게 상처 입히기를, 또한 절규하며 어머니를 불러내기를, 호소하고 흐느끼고 매달리기를, 그 모습이 따귀와 사과를 모두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던 것을 기억한다.
캐럴라인 냅, <욕구들>     


엄마를 원망하는 미숙하고 이기적인 나는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엄마와 더 깊이 있고 진실된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