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릴라 Jul 30. 2021

당신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선택해주세요

[민정님께] ‘원더풀 라이프’의 순간

민정님께 첫 번째 글을 보내고 나서야,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드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막연했을 대답을 불평 없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누가 저에 대해 이렇게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해줄까 하는 마음이 들어 뭉클하기까지 했어요.     


저는 제가 언제부터, 왜, 엄마를 미워하게 됐는지를 알 수 없어서 참 답답했었거든요. 민정님 글을 읽고 제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미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불행 속에서 엄마를 구원해주고 싶었는데 몇 차례 시도를 해도 잘 안됐고 그게 죄책감이 되고, 부담감이 되었던 게 아닐까, 그 부담감이 너무 무거워 엄마를 미워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됐어요.    

<얼루어 코리아> 오은영 인터뷰 중 발췌, 엄마가 저에게 너무 중요한 대상이라 그랬나 봐요.

엄마에게 물어보려고요


제가 뭐라고 엄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왜 엄마가 불행 속에 있다고만 생각했을까요? 엄마는 딸에게 하소연을 했던 것뿐이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엄마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왜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좌절했을까요? 엄마와 딸도 엄연히 각자 인생이 있는 건데 전 엄마와 저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누구야?
 아빠지.

오늘은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민정님이 내준 숙제를 했어요. 설마 엄마에게 언제나 원망의 대상인 아빠일까 했는데, 아무리 어떠니 저떠니 해도 배우자가 자신을 제일 잘 이해해준다는 말에 놀랐어요. 역시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건가 봐요. 엄마 생각으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정작 저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이렇게 가까이에 엄마가 있는데 직접 물어보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민정님 말대로 엄마에게 엄마를 물어보려고요. 엄마에게 물어보면 내가 해결해줘야 할 것 같아서 지레 겁내고 못 물어봤던 질문들을 한번 해봐야겠어요. 엄마와 나는 각자의 인생을 살뿐이라는 것, 누가 누굴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묻고 엄마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다른 이야기 해볼까요?

<원더풀 라이프>의 포스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 보셨나요? 죽은 이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림보라는 곳에 머무르면서 천국에 가지고 갈 하나의 기억을 고르고 그곳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그 기억을 영상으로 재현해주는 내용이에요. 단, 선택한 기억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기억은 지워지는 게 규칙이고요.     

 

며칠 전에 이 영화를 봤는데 보고 나서는 ‘나는 어떤 기억을 고를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20개월 된 아이와 같이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다가, 물놀이를 하다가, 좋아하는 빵을 나눠 먹다가 문득문득 ‘이 장면이 좋을까?’를 생각했어요.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다가 오늘 드디어 선택했어요.

 

복이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합니다

제가 고른 기억은 어느 일요일 오후예요. 아이와 남편은 방에서 자고, 저는 거실에서 엎드려 책을 보고 있어요. 이때 고양이 복이가 제 가까이로 다가와 엎드리죠. 저는 문득 복이에게 다가가 제 턱을 복이 등에 살짝 얹고 엎드려요. 복이 내는 그릉그릉 소리, 복이 털에서 나는 침과 먼지 냄새, 복이 털의 부드러움과 따뜻함, 복이 귀의 말랑함과 시원함을 느끼면서 눈으로는 책을 읽어요.      


영화에서는 기억을 선택할 시간을 3일 주는데요. 저도 3일 동안 고민하다 골랐어요. 제가 고른 기억에는 왠지 꼭 아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는데요. 물론 저의 선택은 계속 변할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억을 선택하고 싶어요. 요즘 자주 제 손을 뿌리치고 남편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에 대한 서운함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민정님은 어때요?


생의 마지막에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무언가는 너무 작고 사소해서 매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 속 인물들이 선택한 기억들도 모두 사소한 것들이에요. 3,4살 무렵 빨간 원피스를 입고 춤췄던 기억, 학창 시절 전차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던 기억, 어머니가 무릎을 내어주며 자신의 귀를 청소해 주던 기억 같은 거죠.      


민정님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천국으로 가고 싶으신가요? 민정님에게는 어떤 기억이 소중한지, 어떨 때에 행복을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사진을 찍고, 영상을 담는 민정님이라 인생의 어떤 장면을 선택하실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특별하기도 하네요.      


민정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을 딱 하나만 선택해주세요. 당신이 선택한 추억은 영상으로 재현됩니다. 마지막 날에는 그 영상을 시사실에서 관람합니다. 그 추억이 당신께 선명히 되살아난 순간 그 추억만을 가슴에 안고 저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어떠세요 민정님?    

<원더풀 라이프>의 마지막 장면이에요. 빈 의자는 민정님의 자리입니다.

2021.7.30

여름 한낮에 잔디깎고 온 은진 드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