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덜 미웠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보니 내가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던 그 일부터였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오겠다고 통보했고, 나는 왜 엄마 마음대로 결정하냐며 화를 냈었는데 그 일 이후 엄마를 대하는 게 좀 편해졌다. 싸우더라도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싫어할까 봐 참았던 말들을 평소에 그때그때 하면서 지냈더라면 엄마를 원망하는 날들이 짧거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만이 없을 수는 없는데 말 안 하고 쌓아만 두니 그게 곪아 있었던 것일지도.
엄마한테 화 한번 냈다고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더 빨리 화를 냈으면 좋았을걸.
2.
사람에게는 핵심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고 어디선가 봤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감정, 근원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나의 핵심 감정은 죄책감과 억울함이 아닐까 싶다. 문제가 발생하면 ‘혹시 나 때문인가?’하는 죄책감과 ‘난 열심히 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 거지?’라는 억울함이 동시에 올라오곤 한다. 엄마에 대한 감정도 그렇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 때문인 것 같고, 왜 내가 그것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억울해하곤 했다. 엄마가 행복하지 않다고 나에게 말한 적도 그게 내 책임이라고 말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는데도.
요즘 엄마에 대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데 내가 엄마의 인생을 책임질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한 근본 없는 죄책감도, 억울함도 많이 사라졌다. 엄마를 좀 더 편하게 대하게 됐다.
3.
엄마에 대한 원망을 덜어내고 나니 그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첫 생리를 하고 생리가 너무 싫다고 달마다 며칠씩 울었던 일, 시험 기간에 잠깐만 자고 일어나서 공부를 하려다 눈 떠보니 아침인데 안 깨웠다고 울고 불고 했던 일, 기분이 안 좋으면 누구라도 알 수 있게 티를 내며 옆에 있는 사람 눈치 보게 만든 일, 주말에 같이 나가자고 하면 웬만해서는 따라나서지 않아 분위기를 깼던 일 기타 등등.
난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키우기 힘든 자식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일들은 다 빼고 엄마가 나한테 잘못했던 일들만 그렇게 떠올릴 수 있었을까 싶다. 어쩌면 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데 원인을 찾다가 만만한 엄마를 찾아낸 건 아니었는지. 내가 어떻게 해도, 뭐라고 해도 엄마는 나를 계속 사랑할 걸 아니까. 나한테 그런 사람은 엄마가 유일하니까.
4.
가게에서 아이 간식을 사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바쁘지 않다고 했더니 엄마가 연수받은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아이돌보미 일을 하고 있어서 정기적으로 보수 교육을 받는데 오늘 교육을 받았다고. 사실 교육받을 때마다 엄마가 어린 나에게 잘못했던 일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예전에는 다들 그렇게 키웠고 엄마가 잘 키워줘서 지금도 잘 산다고 답했더니 엄마는 아니라고 했다. 그때도 안 그런 사람은 안 그랬다고. 여유가 있는 지금 다시 키우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몰랐다고. 3살의 은진이, 5살의 은진이, 9살의 은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이 간식을 계산하고 차에 태우는 찰나여서 급하게 통화를 마쳤다.
이제는 진심으로 어린 나에게 무섭게 화를 내던 엄마를 이해한다. 너희 아니면 벌써 이혼했다는, 자식밖에 없다는 부담스럽기만 하던 말이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이라는 걸 알겠다. 자식 때문에 고생한 불쌍한 엄마가 아니라, 나와 동생 덕분에 행복했고 행복한 엄마라는 걸 알았다. 더 이상 사과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이 내가 엄마를 미워했던 시간에 마침표를 찍어줬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진짜 끝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