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희미하고, 놀라울 만큼 강렬한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내린 층에서는 군고구마 냄새가 진하게 났다.
사장님도 "어떤 집에서 고구마를 굽나 보네요?"라며 말할 만큼 결코 서 너개 구워서는 날 수 없는, 손이 아주 큰 아주머니가 솥째 가득 삶는 듯한 냄새였다.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군고구마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뱃 속에 핫팩을 품은 느낌이 들었다. 푸근하고 폭신한 냄새였다.
어떤 집 뒷베란다를 열었을 땐 잘 말린 대추향 같은 게 났다. "저기는 펜트리처럼 쓰시면 돼요"라고 가리킨 곳을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각종 구황 작물과 사과 박스, 말린 나물들이 쟁여져 있었다. 그것은 소박하고도 풍요로운 곳간의 냄새였다.
어떤 집은 문을 열자마자 독특한 냄새가 났고, 어떤 집은 신기하게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날 하도 많은 집을 보고 다녀서 그런지,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것도 냄새의 종류 같았다. 마지막으로 본 집은 아주머니가 저녁으로 청국장을 끓이고 계셨는데, 외투와 머리카락에 밴 청국장 냄새가 우리 집까지 따라왔다.
회사 생활의 냄새는 이런 거다.
어디선가 좋은 향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면 여지 없이 동료 한 명이 찹찹 핸드크림을 바르고 있다. 구내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오늘의 메뉴를 코로 맞춘다. 그러고 보니 우리 회사는 돼지 냄새가 안 나는 돼지고기로 유명해졌네?
때로 냄새는 과거의 내가 보내는 신호 같다. 그 신호는 너무나 미약한 나머지 한번 놓치면 다시 코앞으로 데려올 재간이 없다.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단어로 표현할 수도,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도 없다.
한 번은 피부관리실에서 얼굴에 무언가를 발라주는데 몹시 반가운 냄새가 났다. 초등학생 때 학종이에서 맡아본 그런 향이었다. 나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직원분에게 제품명을 알려달라고 졸랐다. 그 제품이 영업 기밀인지 어쩐지 대답을 피하시길래, 향 때문에 그러니 제품 뒷면에 관련된 성분이라도 읊어달라고 했다. 포도추출물이라는 힌트만 손에 쥔 채로 타임머신의 문은 힘 없이 닫혔고 학종이에 코를 대고 킁킁대던 10살 남짓의 나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한 번 주파수가 제대로 맞으면 냄새는 무서울 정도로 생생한 기억이 된다.
보라색 병에 담긴 불가리 향수 냄새가 스쳐지나갈 땐 전전전전 남자친구가 떠오른다. 그가 둘러주었던 머플러에서 따뜻하고 포근한 보라향이 폴폴 났다. 그것은 그가 나를 가장 좋아했던 시절의 향이라서 왠지 마음이 아린다.
향기 나는 학용품에서 나던 냄새들은 나를 학교 운동장의 스탠드로, 노란색 밤비노 책상 위로 데려가준다. 아 맞다! 운동회날 운동장에 들어설 때도 무언가 확실히 다른 냄새가 있었다. 교가 속 가사처럼 어느 산기슭의 정기가 섞인 듯한 가을 공기 속 수만 개의 아기자기한 마분지 냄새... 이것을 유리 병에 담을 수만 있다면.
한 번은 어느 집에서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아파온 사람이 있음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몇 십년을 누워 지내던 우리 큰아빠의 방에서 나는 냄새였고,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냄새였다.
나는 큰아빠 옆에서 뛰어놀며 글을 배웠다. 큰아빠는 내가 일기장에 쓴 '마을'이라는 단어를 '동네'로 고쳐주며 단어의 늬앙스를 무척 쉽게 알려주었다.
큰아빠의 냄새가 아픈 사람의 냄새라는 건 나중에 나중에 알았다. 하지만 그 냄새에는 꼭 고통의 냄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은은하게 비누와 로션 냄새도 섞여있다. 매일 누군가가 정성껏 씻기고 닦아주고 빗겨주고 발라주기 때문에 날 수 있는 정성스러운 삶의 냄새였고, 생명의 냄새였다.
여러분은 상상하실 수 있나요? 이 냄새를.
맡아보지 못하면 아무리 설명해도 결코 알 수 없는 냄새의 기억.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단어로 표현할 수도,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어쩌면 큰아빠가 가르쳐 주지 못한 단어에는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