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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몬키 Feb 13. 2024

평양냉면

없어서 못 먹거나, 있어도 못 먹거나

엄마, 아빠에게 잊지 못할 저녁을 선물하고 싶었다.

늘 먹는 돼지갈비 말고, 양곱창 말고, 회 말고. 서울 딸내미집에 갔더니 이런 걸 사주더라며 부산 친구분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아주 희소하고 턱별한 거!


나는 회사 근처에 있는 평양냉면 집을 떠올렸다. 그 집은 우리 직원들의 최애 중 한 곳이다. 하도 자주 가서 탈북민이냐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평냉 육수에 어복쟁반 작은 거 하나면 서너 명이 탐관오리들처럼 배불리 마시고 먹을 수 있었다. 점심때 평양냉면 한 그릇씩 쭉쭉 들이키면 돌아오는 길엔 배에서 찰랑찰랑 물(육수) 소리가 났다. 그날은 양치를 조금 미루더라도 입안에 맴도는 은은한 감칠맛을 조금 더 오래 즐겼다.


이 기쁨을 어찌 혼자서만 즐기랴! 양곱창에 미련을 가진 엄마 아빠를 강제로 차에 밀어 넣고 1시간을 달려간 가게는 다행히 대기가 없었다. 온 우주가 나의 효심에 감동한 나머지 길을 터주는 것인가? 나는 피리 부는 사내처럼 당당하게 별관으로 들어갔다.


"엄마, 사람 많지?"

"어??????"

"사!람!많!지?"

"..."


수많은 손님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들이 나에겐 자랑스러운 맛집의 증표였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전쟁통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이런 상태라면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터. 이때부터 나는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곱창 집도 시끄럽잖아! 속으로 우겨보아도 동네 양곱창 집 대신 강남 속 작은 평양까지 끌려온 엄마 아빠가 마냥 가여워 보였다. 여기 미슐랭 받은 맛집인데 불효막심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중요한 건 음식이니까 마음을 가다듬었다.

엄마, 아빠, 남편은 맛보기로 시킨 평양냉면 육수를 돌아가며 마시더니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이게 무슨 맛이고?" (아빠한테 그릇 패스하는 엄마)

"나는 이제 됐다." (마시자마자 그릇 밀어내는 아빠)

"이걸 왜 먹어?" (진짜 깜짝 놀란 남편)

다들 미슐랭 심사위원 뺨치는 평가를 쏟아냈다. 이 한 그릇이 15,000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난리가 났다.


어어.. 어복쟁반...! 수... 수육...!!

나는 고기를 가족들의 접시에 올려주며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내 편이라 믿은 가족들이 나의 최애 메뉴를 마지못해 깨작이는 걸 보자니 가슴이 찢어졌다. 아빠 어깨 너머 자리 잡은 흑인 손님들은 냉면 면발을 시원하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평양의 맛을 온몸으로 맛보며 즐기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그들의 일행이었다면 얼마나 뿌듯했을까? 12만 6천5백 원. 가족들에게 신용을 잃은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 소식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자 여기저기서 제보가 쏟아졌다.

"나도 그 집에서 똑같은 봉변을 당했다"는 친구가 보내준 인증샷 속에는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일행이 찍혀있었다. 그의 못마땅함이 사진 너머로 전해져 나도 주눅이 들었다.

"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복쟁반 먹으러 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평가를 들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지인도 있었다.

"부산에 평냉집이 왜 없는 줄 아나? 생기는 족족 망하니까!" 내 평생 부산에 분점을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냉 처음 먹이는 사람이랑은 무조건 원수 된다."

나처럼   호되게 당해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비록 오늘 저녁은 망했지만 든든한 평양 동지를 얻은 기분이었다.


집에 와서 새우깡에 캔맥주를 까자 그제야 엄마 입에서 "맛있다" 소리가 나왔다. 엄마, 아빠에게 잊지 못할 저녁을 선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는 그저 잊히고 싶은 저녁으로 남고 말았다. 통일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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