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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영이 Mar 19. 2023

[602] A L P H A B E T

어린이의 눈에 보인 알파벳

나는 정규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영어를 배운 세대이고 그 이전에 윤선생 영어 학습지를 한 적이 있다.

쓰고 보니 놀라운 점... 우리 집은 그다지 사교육이나 선행학습에 대한 열의도 욕구도 없는 분위기였으므로. 그저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고 싶어 했고, 내가 하고 싶어 하니까 시켜주신 것 같다. 친구들이 다 학원 다니는데 나만 안 다니면 외로움 느끼던 그런 식으로. 



암튼 처음 시작은 알파벳부터 배우는 것이었고 ABCDEFG abcdefg 등을 다 배운 뒤에는 숙제를 내주셨다. 학습지에 있는 영어 문장을 영어 공책에 그대로 따라 쓰라는 것이었을 텐데, 문장이니 당연히 대문자로 시작하고 그 뒤에는 소문자들, 특이한 몇몇 경우에는 또 머리글자가 대문자였을 텐데도-

나는 그 숙제에 나온 알파벳의 90% 이상을 대문자로 작성했다. 소문자로 쓰여 있었지만 결국 A와 a는 같은 글자라는 것을 배운 뒤였으니, 같은 글자라면 둘 중 나의 마음대로 선택해서 써도 되는 거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의 마음대로 선택해서 써도 된다는 전제부터 틀렸지만, 그 전제의 뒤에도 대문자로 쓴 게 더 많았던 이유는, 첫째로는 소문자가 너무 옹졸해 보였다... 균형 잡힌 A라는 글자에 비해 a는 옹졸하고 못생겨 보였고, 둘째로는 A에 비해 a는 그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곡선도 곡선인데 이게 맞는 문자인지도 어렵고. a의 모양에 대해서도 나는 그 뒤로도 많이 고민을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B보다는 b가 쓰기 쉬웠으므로(그려야 하는 곡선이 한 개 적음) 몇몇 글자는 소문자로 작성했다. 


선생님의 다음 방문 날- 선생님은 나의 숙제를 보고 당황하시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늘 칭찬과 장점 위주로 말해주시던 좋은 분이셨으므로(ㅠㅠ) 일단 너무 잘 했다고 하시며, 그런데 대소문자는 이렇게 섞어 쓰면 안 되고, 기본적으로는 소문자를 쓰는 일이 훨씬 많다고 설명해 주셨다. 

나는 그 설명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소문자 싫어! 못생겼어! 그리기도 어려워!) 나는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는 규칙에 잘 순응하는 타입이므로 그 싫은 소문자를 받아들여 고쳐나갔다. 


내가 이걸 정규 교육과정에서 영어를 배우기 이전이라고 정확히 기억하는 건, 저런 일이 있은 이후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학교 선생님이 똑같은 설명(알파벳 대소문자는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게 아니다, 규칙이 있다)을 하셨고, 그 설명을 들으며 '나도 옛날엔 저런 실수를 한 적이 있지ㅋ'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ㅋㅋ)



나는 지금도 알파벳 대문자를 더 좋아한다. 타이핑을 할 때는 대문자를 쓰는 게 Shift 키를 누른 상태로 키보드를 눌러야 하므로 더 귀찮지만, 혼자 일기장 같은 곳에 영어를 쓴다면 april도 April도 아닌 APRIL로 쓸 때가 훨씬 많은 식으로. 

그때의 어린 나를 지금 세간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해석들이 나올까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알파벳 소문자를 싫어하고 대문자를 좋아하는 나는 자아가 비대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강박적인 아이가 되었을까? 그저 어린이의 눈에 예쁘고 못생겨 보이는 문제와 어린이의 손으로는 곡선을 그리기 힘든 것의 문제였을 뿐임에도.



원글: https://blog.naver.com/s_hi/22269346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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