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서 나와 동갑내기 선생님 2명이 장학사에 합격했다. 두 명 모두 합격해서 다행이다. 참 잘된 일이다. 교감 선생님이 나를 불러 내년에 시험 볼 생각이 없냐고 했다. 또래들이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자료를 얻어 공부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2년 전에 장학사 시험을 보았고, 준비하면서 40대 후반은 외우기 공부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고3이었던 딸아이와 함께 독서실을 다니며 공부했지만 결과는 1차도 통과하지 못했다. 실패 후 나는 부끄러웠다. 응원해 준 주변 사람들에게 불합격을 알리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올해 동료의 합격 소식을 들으며 내 마음이 요동쳤다. 상대의 성공이 부러웠고(아니 정확히 질투가 났다.) 나의 불합격이 떠올라 잊었던 속상함과 마주했다.
나는 잘난 척하느라 억지를 쓰는, 못된 성깔이 있다.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 얼른 인정해야 하는데 ‘~카더라’하는 말을 믿고 끝까지 밀어붙여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나 흥미가 가는 소문에 특히나 그렇다. 무조건 믿고 사실이라고 확신해버린다. 그러다 반증(反證)을 만나면 인정하면 되는데 끝까지 믿지 못하는 태도를 취한다.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내가 틀릴 수도 있겠는데.’라는 느낌이 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애써 외면하여 상대의 논리를 힘이나 말발로 꺾으려는 억지를 부린다.
공부에서도 그런 편향이 뚜렷하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고 그 외에 것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즉 편식 공부를 한다. 평상시 공부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맞지만 장학사 시험과 같은 평가를 봐야 한다면 달라야 했다. 출제 문항을 파악하여 그에 맞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공부 방식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지만 나의 공부 방법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조직에서 승진을 하려면 일정한 틀에 나를 맞춰야 한다. 조직에서 요구하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살펴보고 맞추어야 하며 자격에 맞는 공부를 하는 게 필수다. 그런데 나는 내 맘대로 해석하여 오해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나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한다.
자녀의 지적에 가장 반발심이 크다. 경험과 연륜으로 다져진 시야로 훈육한다지만 주관적이고 협소하기 짝이 없는 원칙일 수도 있고, 현재에 전혀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못해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일쑤다.
상대방에게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힘들다.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해오다 보니 내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지 않나 돌아보기도 한다. 세상일이 정답으로 해결될 수도 없고, 또 정답이라 여기던 것들도 오답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도 자주 옹고집을 부린다.
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더해져서 그러는 것 같다. 타인에게 피해주기 싫어해서 도움 요청을 해 본적이 별로 없다. 도움을 요청하며 아쉬운 말 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고 어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공부하고, 육아하고, 일하는 것에 익숙해 버렸고 힘들고 버거워도 전전긍긍하며 버텼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젊은 동료들에게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하여 나의 수고를 인정받고자 하소연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동료 선생님의 합격 소식을 들으며 내 마음을 살펴본다.
그들의 성과는 나의 자존심과 상관없는 일이다. 질투를 느낄 수는 있지만 내가 초라하다던가, 무능력하다던가 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승진하고 싶어?”라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아직도 이 물음에 솔직하지 못하다.
글을 쓰면서 깨닫는다. 나는 자신이 없어서 도전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걸 인정하지 못해 내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렇지 않으면 다른 감정들이 들러붙어 사실을 왜곡시키고 직면을 두렵게 하고 나를 작게 만든다.
이번 주에 진지하게 생각해 볼 작정이다. 교직에서 정확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