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애완동물을 반기지 않았다. 오랜 시집살이와 대가족과 아이들만으로도 일은 넘쳤다. 보리 이전에는 거북이, 열대어, 고양이들과 길지 않게 살았지만 딱히 애정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보리를 입양한 것은 삶에 좀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보리는 보더콜리 암컷이다. 가족들이 보더콜리 종을 원해 강원도의 한 가정집에 가서 2개월에 데리고 왔다. 정말 우리 보리보다 더 이쁜 보더콜리는 보지 못했다.
서울에 살 때는 집안에서 키웠는데, 꼬맹이 때는 보더콜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고를 많이 쳤다. 차차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게 드러나면서 식구들은 각각 집안에서 보리를 달고 다녔다. 그때 살던 집은 타운 하우스인데, 3층에 지하까지 있었다. 보리는 가족을 따라 사람보다 계단을 앞장서 올라갔고, 달려 내려왔다. 청소해 주러 오시던 아주머니가 보리의 털에 진저리를 쳤다.
낡은 주택은 추워서 거실에 고다쯔를 두었는데, 그 따뜻한 상의 이불 아래 기어들어 갔다가 “귤 먹자!” 하면 나와서 함께 귤을 까먹으며 겨울을 나기도 했다. 어지간한 우리의 말은 다 알아듣는 녀석이었다.
"보리는 한창때 문고리도 풀고 나왔지. "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보리의 전설이 매일 가족들에게 전해질 무렵, 보리가 말갛게 신뢰하는 눈빛을 던지면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의 리즈시절, 항동수목원에 산책시키러 나가면 부러움의 시선을 몰아 받았다. 남편이 손짓만 해도 훌쩍 그의 어깨까지 뛰어올라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기도 했다.
보리는 6세에 어린 남편 상구를 맞아, 상구보리 하여 하화중생은 못 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 : 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 ‘바람’과 ‘하늘’이란 두 아들을 두었다. 아들 둘은 믿음직스러운 젊은 부부에게 입양 보내고, 딸 사리는 보리 사후를 고려하여 키우려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격한 아이들에게 유난히 애착이 갔고, 특히 사리가 이뻤다. 새끼 때부터 늘 품에 안고 다니고 사랑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중년이 넘어가면서 이 아줌마 어찌나 질투가 심한지 우리만 집에 없으면 딸내미를 쫓아다니며 으르렁댔다. 옆집 아줌마가 목격하고 알려주어, 어쩔 수 없이 사리도 의귀리의 아는 집에 보냈다. 그 집에서 듬뿍 사랑받았지만, 오래 못 살고 교통사고로 죽어서 여러 사람이 비통해했다.
7년 전 비 오던 날, 보리는 집을 나갔다. 교통사고를 당해 집에 못 돌아와서, 남편과 내가 며칠 동안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이름을 부르고 다녔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말이 끼어 며칠을 기다리다가, 월요일 혹시나 하고 제주시 유기견센터에 전화를 건 나는 보리가 그날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우리를 보고, 보리는 다리를 절름거리며 쫓아왔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꼬질꼬질해진 보리를 안았다. 그 길로 제주대학교 수의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받았다. 사실 강아지에게 그렇게 거금을 들인 수술을 해준 건 남편의 용단이었다. 보리는 남편의 개였다.
늙으면서 약고 드세진 보리는, 또 다른 보더콜리 수컷인 나무를 아주 고양이 쥐 잡듯 했다. 순한 나무는 우리 옆에 오지도 못하고, 보리의 눈치만 보았다. 다리도 잘 못 쓰고, 잘 못 걸으니 다소 비만해진 늙은 강아지지만 기세가 당당했다.
그래도 그 비 오던 날 사고를 당하고 죽지 않고 우리 품에 돌아와 준 게 고마워서, 우리에겐 항상 나무보다 보리가 우선이었다. 같이한 세월이 얼마인가.
8월 어느 하룻밤 새 보리가 떠나고 난 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나무만 기르고 더 이상 강아지는 키우지 맙시다."
우리 가족은 보리에게서 반려견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과 어려움을 맛봤고,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어린 보리의 영민함.
보리의 힘찬 도약.
보리의 출산이 주었던 그 놀라움.
교통사고와 늙은 보리가 주는 안타까움.
반려견 한 마리와 함께 해온 삶의 장면들이 내 기억 창고에 차고 넘쳤다.
정말 가족도 이런 가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