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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양 Apr 22. 2022

3개국에서 겪은 코로나 2년

도시 괴담 같았던 도시 봉쇄




오히려 빨리 코로나에 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게 된 세상이 되었다.


우리 집도 대도시에 살고 있는

작은언니네 부부를 시작으로

큰언니와 엄마까지 차례로 확진되었다.


남편도 사무실에 종종 동료들이 출근하지 않으면

으레 확진되었거니, 하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제는 정말 끝을 볼 수 있는 걸까.

이제는 정말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를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시간이 돌아온 걸까.


그래.

코로나와 함께 한 3번의 봄,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




+



한국의 한 종교단체 발 대규모 확진자가 나와

나라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던 2020년 봄,


나는 남편의 장기 출장으로 6개월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내고 있었다.


전염병이 전 세계로 조금씩 확산되고 있었고,

내가 가는 쇼핑몰의 약국과 마트에서 마스크나

손세정제를 구하기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쿠알라룸푸르는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말을 주고받게 된 그랩 기사들은

말레이시아는 아직 확진자가 많지 않다며

대신 한국 걱정을 해주곤 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도 곧 전염병의 폭풍이

몰아치는 전조 증상이 일어났다.


수 만 명이 참석한 대규모 종교집회에서

확진자가 발생한 것이다.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다.

신원을 특정할 수 없었기에

정부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진단 검사를

권유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한인 커뮤니티에서 봉쇄령이란 세 글자를 보게 됐다.


말레이시아 총리가 봉쇄령을 선포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었고 대부분의 현지인들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봉쇄? 말도 안 된다.

21세기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도시를, 나라를 봉쇄한다고?

강제로 사람들을 집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고?

회사나 상점을 무조건 문 닫게 한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오후가 될수록 사재기 현상으로 매대가 텅텅 빈

마트의 사진들이 돌기 시작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재기는커녕 당장 내일 반찬으로 쓸

식재료도 없었다.

당장 마트로 달려가서 나도 음식들을 사서

쟁여둬야 할 것만 같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한국의 엄마와 언니들은

혹시 혼자서는 위험할지도 모르니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마트에 가라고 했다.


과거 한국도 전쟁설이 나돌면

사재기 현상이 있었다고 했다.

쌀과 라면, 냉동식품, 파스타면과 소스 같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품들을 구입하라고

조언해주었다.

봉쇄령이 내려진다고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만큼 열악한 상황이

되진 않을 거라고,

엄마와 언니들은 나이만 먹었지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막내의 불안감을

지워주려고 노력했다.



+


퇴근한 남편과 함께 마트로 갔다.


그때 우리는 쿠알라룸푸르 시내에 있는 유명 쇼핑몰인

파빌리온 앞의 호텔에 살고 있었고,

식재료는 대부분 파빌리온 몰 지하에 있는 Mercato라는

마트에서 구입했었다.


파빌리온으로 가는 길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파빌리온의 거대한 아케이드를 채우고 있는

다양한 레스토랑과 펍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봉쇄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고

그제야 나는 안심했다.


쿠알라룸푸르 쇼핑 명소 중 하나인 파빌리온 몰


역시 헛소문이었어.

이렇게 외국인이 많은데,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데,

도시를 봉쇄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었다.


그러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의 마트로 가는 동안

내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지하에도 많은 식당과 푸드코트가 있어서

언제나 많은 인파가 있는 곳이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좀 달랐다.

마트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모두 거대한 봉투들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마트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엄청난 사람들이 계산대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 줄이 얼마나 길었던지 매대들을 둘러둘러

매장 끝까지 이어졌다.


늘 이용하는 이 마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걸 본 적 없었다.


얼떨결에 마트 안으로 들어섰지만 카트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한 직원이 카트를

구해와서 건네주었다.


과일 달걀 같은 신선한 식품은 대부분 동이 나 있었지만

채소는 다행히 좀 남아 있었다.


평소 달걀이 있던 선반


한국 쌀과 비슷해서 우리가 주로 구입하던 쌀을 비롯해

대부분의 곡류 매대도 비어 있었다.

남편이 꼭대기 선반에 손을 뻗어서

바닥을 더듬어 우리가 먹는 브랜드의 쌀 1kg짜리를

집어 들었을 때는 진짜 사막에서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파스타 면과 소스도 거의 초토화였다.


그래도 소스 하나 면 하나는 건졌다


평소 한국 라면을 비롯해 각종 누들이 쌓여 있던 매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라면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삼양에서 나오긴 했지만 동남아 지역만을 겨냥해서

만들었는지 한국에선 본 적 없는 불고기 라면이

남아 있어서 일단 카트에 넣었다.


정육 냉장고는 내가 못 먹는 양고기와 통으로 썰린

소고기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생선 코너에는 생선 아래 깔려 있던 얼음만 남아 있었다.


나는 퍼뜩 생각난 것이 있어

논 할랄 코너로 달려갔다.

무슬림 국가인 말레이시아 마트 정육 코너에는

닭고기와 소고기만 진열되어 있고

돼지고기는 주로 냉동된 채 논 할랄 코너에 있었던 것이다.


역시 냉동된 돼지고기가 얼마간 남아 있었다.


이후로도 인파를 헤치고

과자와 초콜릿, 냉동 피자, 냉동 채소 등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만한 식재료들을

카트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물티슈를 사려고 생필품 코너에 갔는데

말로만 듣던 휴지 사재기 현장을 보게 됐다.

두루마리 휴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각 티슈와 키친타올 몇 개만 나뒹굴고 있었다.

물티슈도 사지 못했다.

그나마 청소 때마다 휴지를 채워주는

호텔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계산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었다.

그래도 음식을 살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기다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굶어 죽진 않을 거야, 라는 안도감.


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생존의 걱정이라니.


사람들이 어째서 패닉 바잉을 하는지

이제야 절실히 공감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말레이시아 총리는 봉쇄령을 선포했다.


그날이 3월 16일 밤이었는데,

딱 하루의 시간을 주고

당장 3월 18일부터 나라 전체에

이동제한령을 내린 것이다.


비필수 업종의 회사와 상점, 학교뿐만 아니라

주요 기관을 제외한 정부 기관마저 문을 닫는다고 했다.

종교, 운동, 문화, 소셜 액티비티를 포함

대중들이 모이는 모든 행사도 금지됐다.


마트와 약국, 병원 같은 필수 업종은 문을 열 것이며

필수 인력 또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식재료와 마스크 같은 방역 제품은 충분히 공급될 거라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국경도 닫혔다.

말레이시아 자국민의 출국이 제한되며

모든 여행자의 입국이 금지됐다.


그렇게,

아는 사람이라고는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튜터 한 명이 전부인,

비자 만료일이 2개월도 채 남지 않은

관광비자 외국인 신분으로,

외국인 여행자의 입국마저 금지된 봉쇄된 도시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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