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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Jul 01. 2020

퀸 연아는 아니지만

괜찮아... 지금 이대로!

“엄마, 열심히 연습해서 꼭 김연아 선수처럼 되고 싶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유튜브의 ‘퀸 연아 다시 보기’를 클릭하던 여랑이는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야>라는 인생의 진리를 굳게 믿는 듯했다. 하얗고 투명한 은반 위를 속도감 있게 가르며 춤을 추는 김연아 선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는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요정 같아요. 꼭 등록해 주세요 ” 일곱 살 여랑의 집중하는 눈빛이 한층 빛나던 때였다.


스웨덴으로 이민 온 우리 가족에게 이 나라의 흔한 겨울 스포츠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피겨 스케이팅을 등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스케이팅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기초반에 등록을 하였다.

엉금엉금 주춤주춤, 여랑이는 생전 처음 신어본 스케이트화가 익숙하지 않은 지, 이리 쾅! 저리 쾅! 쿵쿵 엉덩방아를 잘도 찧어대기 시작했지만, 곧 균형을 잡았고 설 수 있게 되었다. 단계마다 주어지는 난이도 있는 과제들도 잘 따라 나가며 진도를 맞추었고, 나 또한 넘어져도 울지 않고 일어서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게 흐뭇하였다.

좋은 시절이었다.




6개월의 기초반 수업이 끝나고 아이는 주 1회에서 주 2회의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헬멧도 벗어던지고, 날렵한 스케이팅 연습복을 입은 아이의 훈련이 좀 더 강도 높게 변해 가는 중이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무릎의 반동으로 힘을 조절하며 뒤로 가기를 연습하는 여랑이의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뒤쳐지는 모습이었다. 같이 시작한 아이들이 스윽슥 아이스링크를 가르며 속도를 내는데 그 사이로 허우적거리는 딸아이가 몸에 힘을 잔뜩 주며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나아가는 모습이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속도가 붙지 않는 여랑 때문에 먼저 도착한 아이들이 느긋하게 아이스 링크 난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이들 뒤로 안간힘을 써보며 어떻게든 빨리 도착해 보려는 여랑이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때, 다시 한번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서는 여랑이 옆으로 아주 조그만 여자아이가 회전 연습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쫑긋 묶어 올린 커다란 푸른 눈의 가녀린 아이는 여러 번 회전을 하다 자연스럽게 아이스 링크를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주변에서 학부모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애가 바로 스테파니 맞지요? 애 엄마가 러시아 피겨 선수였다면서요.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엊그저께 등록했다나 봐요.” 엄마들의 말소리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스테파니를 바라보니, 남다른 균형감과 속도감이 일반인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실력이었다.


스케이팅을 배운 지 며칠 만에 회전을 연습하는 스테파니를 보며, ‘피겨 스케이팅을 괜히 시켰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여랑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이는 수업이 끝나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재미있었니?라는 물음에 땀으로 젖은 머리를 두어 번 끄덕거릴 뿐이었다. <노력하면 다 된다>라고 생각해 오던 여랑에게 스테파니의 재능은 아이 스스로에게도 의문을 던져주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 노력하면 되는 거지?” 자꾸만 확인하려 드는 여랑이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재미없으면 그만 해도 돼. 여랑아!”

“아니에요! 노력하면 될 거예요.” 딸아이의 묵묵한 말에 어김없이 새 학기 등록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랑이의 피겨 스케이팅 실력은 못 볼 지경이 되어갔다. 신중하고 느린 몸동작에 통통한 신체조건은 느려도 너무 느려서 슬로 모션을 자아냈고, 파트너와 짝을 지어서 연습을 할 때에는 여랑에게 짝이 안 생길 까 봐 조바심이 나기도 하였다. 제발 그만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노력하면 되니까>.


여랑이가 일주일에 두 번 피겨스케이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딸아이의 같은 반 친구인 눗사가 새로 등록을 하였다. 눗사는 조지아(Georgia)에서 온 아이였는데 스테파니처럼 몸이 날렵하고 유연해 보이는 친구였다. 수업이 끝나기 전, 여랑이가 눗사에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회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모습이 보였다. 눗사가 웃으며

“너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어려운 걸 하다니 놀라운 걸.”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랜만에 스케이트장에서 여랑의 미소를 보았다. 눗사가 참 고맙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눗사는 딸아이와 같은 레벨로 들어왔고, 여랑이가 가르쳐 주었던 회전도 훨씬 빠르게 해 내며, 딸아이보다 먼저 대회 준비반으로 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피겨 선생님도 여랑이 계속 피겨를 배우고 싶다면 다음 단계인 대회 준비 반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 달라는 재촉을 하였다. 선생님의 생각에도 ‘재능이 보이지 않으니 취미반으로 가는 게 맞는데 본인이 운영하는 스케이트 반에는 취미반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는 정보도 주었다.

여랑은 한참을 망설였다.

“엄마, 한번만 더 이 단계에서 남아서 연습해 보고 자신감이 생기면 대회반으로 갈게요. 선생님께 얘기해 주세요!”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며 속도를 내 보려 애를 써 보는 3개월이 또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스피드는 끝까지 따라 주지 않았다.


“엄마, 대회 준비반에 가서 피겨 경기를 하면 내가 꼴등이 될게 틀림없어! 사람들이 웃을 거야.”

아이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3개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혼자 자세 연습을 하던 아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대회까지 갈 자신은 도저히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여랑의 눈에 눈물이 도랑 도랑 맺히기 시작하였다.

넘어져도, 뒤쳐져도, 서툰 솜씨 때문에 파트너가 되려는 친구들이 없어도, 스케이팅을 배우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여랑의 첫 눈물에 나 또한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새 학기 등록기간이 돌아왔지만, <노력하면 될 거야>를 외치던 딸아이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경기에 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겨울에 호수가 얼면 거기서 탈게요!”

아홉 살이 된 여랑에게 피겨 스케이팅은 아이가 인생에서 맞은 첫 좌절이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승자가 될 수 없는 경계와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공평하진 않지만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 버린 아이가 마음 아팠다.




화창한 5월의 어느 날, 스케이트화 대신 발목 보호대와 축구화를 신고 잔디밭으로 나가는 여랑에게 그날은 참 특별한 날이었다. 아이는 두 명의 수비수를 제치며 30미터 단독 드리블로 첫 골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게임을 마치고, 벤치에 걸터앉아 축구화를 벗으며 여랑이 덤덤하게 이야기하였다.

“축구화도 좋아요! 나한테 딱 맞는 신발이야!”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쓸어주며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의 눈망울이 여름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그래, 여랑아... 축구화 참 멋있다. 우리 여랑이처럼!”

미소로 화답하는 아이의 귀여운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미안했던 엄마의 마음을 물들인다.

<여랑!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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