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스웨덴은 소나기가 한창이었다.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새벽 천둥소리에 잠이 깨어 구석구석 문단 속을 하였다. 달아난 잠에 몇 번을 뒤척이다 스르르 눈이 감기었다.
며칠 더워지더니 세찬 비가 하루 이틀 연이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늦저녁 산책을 즐기는 우리 가족도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홀딱 젖어 버리는 신세가 되었는 데, 여름 비라 그런지 시원하고 청량하였다. 비를 맞아 본 지도 참 오랜만이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 비를 피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년과 소녀가 만난 소나기도 이런 비였겠지요?" 딸아이가 묻는다.
"응, 아마도... "
"그래도 다행이에요. 소녀가 호두를 먹고 건강을 찾을 수 있어서요."
"..... 응, 아마도..."
얼마 전, 황순원의 <소나기>를 살짝 각색해서 잠 못 드는 딸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잠드는 게 힘든 아이였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대충 이야기를 꾸며 들려주곤 했었다. 어두운 밤 서로 누워, 진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들으며 잠이 드는 아이에게 습관처럼 또 이야기를 각색해 버렸다. 소녀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아이의 감수성이 너울처럼 밤잠을 방해할 것 같아 얼렁뚱땅 이야기를 꾸며 댔는데 이렇게 꾸며 댄 이야기는 항상 뒷수습이 문제다.
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들이 신나게 춤을 추다 물방울처럼 하늘로 두둥실 올라가 북두칠성을 이루는 일곱 별의 왕자로 재탄생되어 버리거나,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 뱃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크게 벌여 사업을 번창시키고 당대 가장 훌륭한 명의를 불러 아버지의 눈 수술에 성공한다는 이야기, 신데렐라가 열 받아서 집을 뛰쳐나가 금광을 발견하고 신데렐라 고아원을 운영, 불쌍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나이팅게일과 같은 훌륭한 선생님으로 인생을 마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마구마구 뿜어내면 딸아이는 까르르 웃거나, 그것을 진실로 믿어 버린 채 잠이 들곤 하는 것이다.
소나기도 그런 거였다. 중학교 때 읽은 소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도 하고, 소녀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 까 생각하다가, 소년이 훔쳐다 둔 호두를 먹고 병이 감쪽같이 나아 버렸다는 거짓말을 하여 버렸다.
그런데, 소나기를 맞고 와서 그런지, 아니면 소나기의 각색된 이야기가 꽤나 감동적이어서 그런지, 딸아이가 집에 돌아와서 기필코 책으로 읽어 보겠다고 하였다.
인터넷의 pdf 파일로 정리된 소설을 찾아주며, 고백을 하였다.
"엄마, 가끔 뻥 치는 거 잘 알지?, 내용이 달라질 거야..."
"괜찮아요."
아이도 익숙한 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은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였다.
"뭐야? 소녀가 죽는 거네요!"
"응... 그렇지 뭐!"
"엄마, 근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감동이에요, 엄마 얘기보다 훨씬 더 좋아!"
그날 밤, 딸아이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주제로 일기를 써 내려갔다. 짧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딸아이의 일기에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뭉클하였다.
<거짓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아가는 딸아이의 성장에 마음이 따뜻하고 뿌듯하였다.
<다 의미가 있지요>
어찌 보면 비극이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슬픔 안에서, 그리고 이별 안에서 의미와 추억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또 하나의 축복인 것 같다.
우리네 인생, 짧은 소나기처럼 지나가 버리는 유한함이지만, 짧기에 더 깊은 감동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슬픈 진실이어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