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지 않기
몇 개월 전 <대안학교 졸업 후 10년>에 쓰려고 '일반화를 깨려는 실수'라는 메모를 적어두었다. 어차피 가까운 미래에 이 메모로 멋진 글은 쓸 수 없을 것 같다.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페일 블루 아이>에서 에드거 앨런 포는 잠에서 깨 비탄에 빠진 여자에 대한 시를 썼는데, 단순히 "돌아가신 어머니가 말해준 걸 받아적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처럼 죽은 자가 말해준 것은 아니지만 나도 두서없이 떠돌던, 그러나 나에게로 계속 수신 되던 생각들을 속기사처럼 받아 적는다.
누구나 타인의 선입견 속에서 살아간다. 생득적 특성이 외양으로 도드라진다면 남들보다 더 많은 선입견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운이 좋게 그런 타입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는 본인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루트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더 많은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루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걷는다면, 그것이 '개척'이라고 높게 평가되는 것은 생각보다 먼 미래의 훗날일 수 있다.
어딘가에는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보편적인지, 특수한 것인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마음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너무 강해져 사고가 마비되면, 이렇게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면 서로 탐색과 평가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 사람과 잘 맞을 것인가. 우리 집단에 잘 녹아들 것인가.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으로 서로의 뇌가 돌아가는 소리가 한 방을 가득 메울 정도다. 이 때 나는 곧잘 '일반화를 깨려는 실수'를 저질렀다. 과거의 내 독특한 선택들 때문에(진짜 독특한가? 객관적으로?) 남들이 혹시나 날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싶어(이게 얼마나 의존적인 생각인지) 빨리 벗어나려고 지나치게 노력했다. 웃기게도 탐색과 평가는 서로 하는 것인데, 나에게는 마치 그 주도권이 없는 것마냥 굴었다. 내가 나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듯이, 남들도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내 후진 점까지 속속들이 들여다 볼 것만 같았다. 지나친 자의식 과잉이었다. 애초에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타인을 그렇게 세밀히 들여다 볼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나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여전히 어떤 측면에서 나는 지나치게 노력하면서 소속되길 원하지만, 더 이상 그 생각들이 내 인생 전체를 주도하게끔 놔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으로 연결된 개인은 소속 상관 없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고, 스스로의 외로움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함께 가면서 천천히 녹여나가는 것이라는 걸 안다. 운이 좋아 이 시절을 함께 보내게 된 인연들을 귀하게 여기면서 조금씩 나답게 살고 있다. 나는 일반화를 깨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나답게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