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
마냥 좋아서 분기별로 여행을 올 정도였지만 살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소중했기에 이따금씩 아껴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러나 꽤나 굳건했다고 믿었던 심지도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갑자기 실직을 한 상황에서 찾게 된 관심 분야의 일자리. 비행기를 타고 면접을 보러 간 모험 끝에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다.
선택과 책임은 시작됐다
일주일 동안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위기는 있었다. 배를 타러 가기 전날 밤, 안 가면 안 되냐는 엄마의 물음 때문에. 꼭 원양어선을 타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후로 분기마다 본가에 가게 될 줄 모르고) 괜히 마음만 먹먹해져서 뜬눈으로 지새우다 새벽 두 시에 이삿짐을 실은 차를 타고 목포로 떠났다. 그리고 가는 도중 연이어 나타난 고라니들로 인해 차 범퍼가 떨어지기 직전 제주에 입도했다. (고라니 산란기 때는 고라니가 도로에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
사람이 좋아서
이직한 회사에서는 여행을 좋아하고 주체적인 20-30대 타지 출신의 직원들이 많았다. 서로 비슷한 특성과 상황에 처해 있어 동료들 대부분이 내 일이 아니어도 기꺼이 조력하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스스럼없이 근무 시간 외에도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로 서로가 친밀했다. 모두가 하나 같이 회사의 장점으로 '사람들은 정말 좋다'라고 꼽을 정도로. 이 근거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여전히 꾸준히 있다. 그만큼 인간적인 동료이자 어른의 품격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이때까지 내가 회사에 존속할 수 있던 큰 이유였다.
환상의 워케이션
초등학교 때부터 교통 왕복 4-6시간이 일상인 경기도민으로 살다가, 도보 20분으로 출퇴근하는 제주도민의 삶의 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더군다나 추위를 타는 나로서는 큰 기폭 없이 온난한 날씨까지 만족스러웠다. 한라산 풍경으로 아침에 눈을 뜨고 사철 푸른 가로수를 지나는 길. 출근길의 발걸음이 이토록 가벼울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했다. 비록 일과 삶은 썩 균형적이지 않을 때가 많았어도 그럴수록 혼자 만의 시간이 너무 귀해서 항상 실망 없이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자연에게 빠져들었다. 제주에 살게 되면 특별했던 여행지가 무뎌질 것 같았던 건 괜한 우려였다.
시작은 어설프고, 과정은 무르익고, 끝은 늘상 아쉽다. 물리적으로 동떨어진 섬에서의 모든 순간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내 몫은 갖은 시행착오를 거쳐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하게 했다. 때때로 휘황찬란한 대도시에서 받는 자극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자연의 영감과 새로운 경험과 다정한 사람들이 곁에 있어 결코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그 안에서 마주한 행복 또한, 우연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호의로 만들어진 행운이란 걸 잘 알고 있기에 감사하다. 3년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이 도시가 너무 애틋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