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괜찮아도 괜찮아.
16박 17일의 긴 유럽 여행이 끝났다. 그 이후로 일주일도 더 지났다.
다시 글을 쓸 수 없어서 빈 노트를 여는데 시간이 걸렸다.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독일, 네덜란드를 거쳐 다시 프랑스에서 마무리되었던 유럽 여행은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가기 몇 주 전부터 비행기 공포증, 파리의 소매치기에 대한 기사, 유튜브를 수없이 찾아보고, 수년 전에 사놨던 크로스백, 스프링 고리, 허름한 지갑, 옷가지, 상비약 등을 챙겼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12시간 비행은 무사히 마쳤고, 나라 간 비행기도 무리 없이 탔고, 도시 간 이동을 위해 기차와 승용차, 관람용 보트도 즐겼다. 나와 남편의 지인, 그들의 가족 등 10여 명의 사람들과 낯선 장소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많은 위로와 배려를 받았고, 사람들이 주는 온기와 에너지에 불안함, 우울감을 느끼지 못했다.
6곳이나 되는 미술관을 다니면서 정서적 허기가 채워지는 것 같았고, 반짝이는 파리의 에펠탑을 보면서 오랜만에 낭만을 느꼈다. 대부분을 걸어 다니면서 매일 새로운 일정들을 소화하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각 나라마다 다른 분위기, 음식, 문화, 예술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고 9월의 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 모든 것을 해낸 내가 너무 자랑스러웠고, 이제 뭐든 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았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여기에서 했던 것처럼 전시회도 다니고, 멀리 걸어 다니기도 하고 새로 취미 생활도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도 조금씩 만나기 시작해 봐야겠다. 여기 사람들처럼 소박하게 살면서 요리도 해 먹고, 장도 보고 여유 있게 천천히 살아봐야겠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기에 일상으로 돌아가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일상.
너무 유럽에 젖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무리해서 에너지를 썼던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걸까?
시차 적응은 실패했고, 몸은 계속 피곤했고, 의욕은 샘솟지 않았다.
일을 쉬는 동안 만들었던 나의 루틴-걷기, 필사, 독서, 화분 가꾸기, 소소하게 글쓰기- 중 어떤 것도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함이 몰려왔고, 명치에는 무언가 걸린 듯 답답함이 느껴졌다. 농담처럼 남편에게 "나 유럽 향수병에 걸렸나 봐."라고 이야기했지만 생각보다 불편함, 우울함, 답답함은 지속됐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유럽 가기 전에 예약해 둔 근교로 1박 2일 여행 날짜가 다가왔다.
근교에 바람 쐬고 오면 좀 나아지겠지.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여행의 여운을 정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웬걸... 체하면 어떤 음식도 소화를 못 시키는 것처럼, 가슴의 체증은 더 심해졌고, 아직도 나는 무엇도 시작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나는 나아지려고 유럽여행도 길게 다녀오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도 받고, 좋은 것도 보고 왔는데.. 왜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걸까..
이런 내 상태를 남편도 감지했는지 계속 눈치만 본다.
그게 더 답답하고, 미안하고, 좀 더 다운되고,
또 그런 나의 상태에 남편은 더 눈치 보고 같이 다운되고..
그럼 또 내가 미안해서 억지로 텐션을 올리고, 에너지가 쓰이고, 의욕이 없어지고 또 늘어지고 답답하고..
이런 식의 반복이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에 해준 말이 마음에 꽂혔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 유럽 여행 다녀왔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게, 나는 더 나아지려고 유럽 여행을 갔던 것이 아닌데, 그냥 올해 있었던 이벤트 중에 하나일 뿐인데, 크게 의미를 두고 있었던 걸까?
이 또한 나의 욕심이었을까.. 올해 말쯤이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나의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그 시점을 '유럽여행'이라고 혼자 마음속에 잡아 놓은 계획 때문은 아닐까?
다 내려놓고 이제야 쉬는 기분이 들었던 9월 초.
그 깨달음이 무색하게 나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고 빨리 나아져야 한다고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조금씩 지쳐 보이는 남편을 보면서 마음 한편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자, 정신 차려보자.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은.
나는 아직 아프고, 도움이 필요하고, 주위 사람들의 격려와 배려가 필요하다. 끊임없는 용기의 말이 필요하고, 사소한 것에도 용기가 날 수 있도록 칭찬이 필요하다.
이런 나를 위해 남편이 조금만 더 힘내줬으면 좋겠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타인이고,
내가 주저앉았을 때 내 옆에 같이 앉아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아직은 혼자 일어나기 어려우니까, 조금만 힘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온전히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에 가기 전 어느 날 허양의 남편은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고,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부정되는 것 같아 절망스러웠던 날이 있었다. 우리는 혹시 그동안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던 걸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얼이 빠져 있던 남편의 모습을 본 허양은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하루하루 자신은 힘들게 붙잡고 있다면서.
남편은 생각했다. 그래…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허양 아니던가. 누구보다 힘들 것은 그녀다.
그런 그녀와 긴 유럽여행을 다녀왔고 그녀는 다시 남편이 조금만 힘내주길 바란다.
그럼 당연하지. 힘낼게. 천천히 일어나도 돼.
대신 신해철 노래 가사처럼 이것만 약속해 줘.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하나만 약속해 줘 어기지 말아 줘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 내 소중한 사람아
그것만은 대신해줄 수도 없어
아프지 말아요
그거면 돼 난 너만 있으면 돼
- 신해철 ‘단 하나의 약속’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