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가장 다이나믹했던 것은 찌찔한 보스
어이없이 입사했다하여 일을 대충하진 않았다. 열심히 했고 할수록 재밌었다. 과중한 일이 주어져도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 저연차 직장인이 할 수 없는 범위의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종합상사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고, 영업사원으로서 역량과 평판을 키워갔다.
A부터 Z까지, 물건을 구매해서 다시 팔고 돈을 받는 것까지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는 것이 종합상사였기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 내 맷집을 키워준 한 일화를 꺼내 본다.
조직체계상 그분은 내 보스의 보스의 보스였고 그 분의 연차는 대략 20년 즈음 났을 것 같다. 그분께 특별히 악감정은 없고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닌데
다음의 일화는 리더는 얼마나 지질해질 수 있는가 하는 좋은 사례일 듯하다.
추측하기로 잘난 체를 좋아하신 것 같다. 그건 누구나 그러니까 뭐라 할 수 없다. 나도 자랑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니까. 그런데 그 잘난 체를 부하직원에 한다는 거다.
이런 데 안 와봤지? 이런 거 처음 먹어보지? 내가 미식에 관심이 많아서. 나는 예전에 회사에서 상도 많이 탔어. 내 방에 와서 이거 보아봐 등등.
그중 가장 자주 한 이야기는 자식에 대한 이야기. 내 아들이 골프를 치는데 이렇게 잘 쳐. 내 딸이 이번에 외국 회사의 인턴인데 지금 외국 어디에서 일해.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면 세대 차이가 나는 직원들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자신 세대보다는 자식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또다른 추측하는 그분의 성격은, 잘난 체에 이어 뭔가 cool 한 상사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은 갑자기 한 팀을 불러서 가감 없이 자신에 대해 장단점을 말해 보라고도 하고 직급별로 모아 경청을 하겠다며 아무 이야기나 해보라고도 한다.
아무튼 그런 분이었는데 언젠가 우리 팀을 갑자기 부르더니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장단점을 말해 달라는 거다. 돌아가면서 하나씩 이야기를 하는데 ‘장점은 이러저러 한데 단점은 딱히 잘 모르겠어요’ 라는 형식적인 답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물어보셨으니 솔직하게 대답을 해드렸다.
' 단점으로 자식 이야기를 너무 하신다 그것도 잘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지만 내용은 그러하다. 그러고 나서 싸한 분위기가 잠시 돌았고 그리고 그분의 한마디.
'내가 자각하지 못한 것을 말해 주다니 고맙네 솔직한 자네 이야기'
그 후로 무슨 미팅이나 모임만 있으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서 자기가 깨달었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어느 날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 아 자네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하나만 이야기하게 양해 좀 구할게'라고 하면서 자녀의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나는 마이너 감성을 가지고 있고 제멋대로 이긴 하지만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더욱이 나는 개혁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고 보수적인 삶을 지향하며 되도록 갈등을 피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다. 그저 물어봤으니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오전 갑자기 사원~대리급은 회의실로 모이란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더니 하는 것은 ‘대화의 시간’ 이란 거였다. 직급차이에 어려워하지 말고 대화를 해보자는 거니 취지는 좋은데 사전계획없이 갑자기 다들 불려간 자리였다..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는 분은 한마디씩 하라고 이야기 하셨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날 지목하더니 하고 싶은 말 있는 거 같은데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 또 물어보시니 대답을 해드렸다.
' 좋은 시간임에는 분명하나 이렇게 사전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할 건 아닌 듯하다. 덕분에 모두 계획한 오전 일정이 틀어졌는데 앞으로는 사전 공지를 해주시면 좋겠다.'라고.
분위기는 몹시 싸해졌다. 그 분의 표정도 이전과는 좀 다르게 싸늘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그분과 그분 바로 밑의 레벨, 즉 나의 보스의 보스들과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내 보스의 보스가 지나가면서 웃으며 다른 직원에게 어제의 일을 묻는다. 내 보스의 보스와 그분은 딱히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제의 에피소드가 그에게는 재미있었나보다..
그리고 오후, 해외지사에서 연락이 온다.
' 야 너가 그런 이야기를 그분에게 했다며? ㅋㅋㅋ 시원하네.'
사실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 질문이 있었고 나는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예의 없지 않았고 주제와 어긋나지도 않았다. 위에 이야기했듯 나는 보수적이고 잔다르크와 같은 투사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그분부터 내 위의 보스 레벨까지 여럿이 미팅이 있는 날. 미팅을 마치고 나서 옆 팀에 팀장이 나에게 오더니
' 야.. 얼마 전 이런 일 있었다며, 너가 가서 사과하는 게 어때?'
그래서 물어보셨으니 대답을 또 했다.
' 그런데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무얼 사과해야 하나요?'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팀장급 이상의 미팅 때마다 그날의 사건 이야기가 나왔나 보다.
자꾸 다른 분들이 와서 나에게 '너 괜찮아?'라고 묻는 걸 보니.
그렇게 한 달 즈음 지나 그분께서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나에게 근황은 어떻냐고 잘 지내냐고 물어보길래 또 대답했다.
' 아내는 이러하고 저는 이러해서 이렇게 저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을까? 재차 묻는다.
‘그런 거 말고 회사 생황이나 그런 거 뭐 없어?’
아 그제야 깨달었다. 결국 나의 사과를 듣고 싶었던 거구나. 한 달 동안 내게는 직접 별 말이 없더니 미팅에서는 내 뒷담화를 했던거였다. 그러면 누군가 내게 압력을 넣어 본인에게 사과하러 올 텐데 안 오니 답답해서 직접 부른 것이었다.
그렇게 참다가 이제야 부르셨다니, 그분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기로 했다.
' 그때 제가 직장 생활이 얼마 안 된 사람으로서 대선배의 마음을 이해 못 했고 이후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제가 경솔한 것 같단 생각을 했지만 기회를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먼저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을 그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는 이어지는 이런저런 무의미한 이야기들, 그리고 내가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한마디를 더하셨다..
' 우리 회사는 사과의 편지 시스템이 있으니까 그런 걸 이용해 보는 게 참 좋아'라고.
당시 우리 회사에는 무기명으로 글을 써서 편지함에 넣으면 상대에게 전달해 주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마무리해 달라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간단히 편지를 써서 보내 드렸다.
이 이야기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일까?
나는 왜 처음부터 그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던 걸까?
난 까칠한 사람이 아닌데. 친구도 많고 인간관계도 좋은 편인데.
어느 순간 눈치보지 않고 대쪽 같은 사람으로 회사에서 포지셔닝이 되어버렸다.
말했지만 나는 나서기 싫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지셔닝이 되다 보니 그 다음부터 어디선가 발표를 하거나 나서야 할 때 본의 아니게 앞장서게 되었고, 덕분에 회사에서 내게 막 대하는 사람은 없어 생활이 편해지기는 했다.
굳이 리더가 부하직원을 이기려 할 필요가 없다. 이미 타이틀과 포지션의 차이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사건을 장시간을 끌면서 어떻게든 부하직원에게 본인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들어야만 속이 시원하다면, 그 리더가 찌질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덕분에 많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