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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Oct 06. 2022

'노인'을 연기하는 노인

바람이라도 필 수 있는 사람이면
그나마 낫다


한 노교수님이 했던 '도발적'인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단순히 분륜이나 파탄난 가정과 같은 도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또는 욕구에 따라 맘대로 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자신의 욕망과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는 맥락에서,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보단 낫다는 의미였다.


성인이 되고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면 더 자유로울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어깨에 쌓여가는 역할의 무게 만큼 자신의 욕구는 쪼그라든다.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며, 직장 내에서의 역할에 얽매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은퇴 후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 것이라 희망하지만,

갑자기 지워진 '노인'이라는 역할의 무게가 생각보다 많은 선택지를 지워버리는 것 같다. 노쇠해가는 자신의 몸, 온갖 만성 질환, 경제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상황 등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들이 붙는다.


분명 시대가 바뀌면서 노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세대도 늘고 있다. 자신의 은퇴 후 삶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활동하는 액티브 시니어 (active senior)들이다. 분명 방송과 언론에서는 자신을 위해 사는 액티브 시니어들이 자주 비춰지늦데, 오늘도 내가 만나는 어르신들은 몇 번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음과 같은 말을 툭툭 내 뱉는다.


'자식들에게 피해 줄텐데 내가 참고 지내야지.', '내가 그러면 남들이 욕해.'

'내 나이에 그 정도면 됐어.', '이제 뭐 다 늙어가지고 사람 만나서 뭐해, 곱게 늙다 가야지'


'그럼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싶으세요?'

'.....'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임을 믿어왔는데, 분명 마음도 나이들어 가는 모습이 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이름 석자로 기억되던 사람들이 그저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로만 남는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노인네 한 분이 앉아 있을 뿐이다.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진료실의 공기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생기’다. 살아 있는 느낌. 목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곱슬한 파마머리, 넘어질라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걷는 전형전인 노인이다. 그러나 안경 뒤로 보이는 초롱한 눈빛, 자신이 얼마나 경로당에서 인기가 많은 사람인지, 자신이 예전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며 으쓱하는 모습이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만들었다. 


특히 할머니가 처음 동네 경로당을 찾았을 때, 여자라고, 아직 나이가 젊다고(나이는 절대 숫자로만 받아들이면 안된다), 막내가 왔다며 텃세를 부리는 할아버지 회장과 총무에게 따박따박 대들며 골탕을 먹이던 일, 다음 날 막걸리 두 병을 사 갖고가 할아버지들과 온갖 서운함을 털어내는 호탕함.  코로나 때문에 밖에 못나가 다른 사람들과 투닥거리는 건 줄었지만, 빨리 나가고 싶다던 할머니의 바램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러다 할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냈다. 

남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끝까지 자신을 힘들게 한다며 남편 흉을 보는 건 할머니의 가장 중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남편분 흉을 보는 시간이 줄기 시작했다. 대신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늘었다.  

남편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마음에 깊게 각인된 것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식사였다.

기력이 떨어져 밥톨하나 씹지 못하던 할아버지가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끓여준 미역국 한 그릇을 천천히 비웠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도 생전 좋아하던 미역국 한 사발을 먹였으니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듯 했다.


이후 할머니의 침묵이 늘었다.

할머니의 생기는 할아버지의 빈자리와 함께 사라졌다. 원래 다니던 노인대학 먼저 다시 등록할 것이라며 정작 할머니는 나중에라도 하고 싶다고 매일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 할머니라면 생각지도 못할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 이제부터 뭐 하지?
나이들어 할 수 있겠어?


마음이 늙는다는 것을 단지 찾는 사람이 없기에, 노쇠했기에, 돈이 없기에 위축된 마음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했고,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그리고 어떤 자신을 꿈꿨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여기 살아있는 분들로 되돌아가길 바랬다. 그분들에게 '노인을 연기하는 노인'이 되지 말고 자신의 욕구를 피하거나 미루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할머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 옆에 끝까지 계셔주셨으니 이제부터 '할머니' 자신을 찾으라는 어쭙잖은 말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노년기는 더 많은,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시간이다. 

몇몇 소수가 아닌 모두가 겪게 될 시간이다. 그 시간이 오면 빈자리와 외로움 안에 자신만 남겨진다. 더 많은 상실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이를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 어떻게 울음을 삼키며 살아갈 것인가. 그저 침묵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거나 또는 인생 후반기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삶의 관록에 기대거나.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전처럼 그들의 마음이 늙었다며 씁쓸해 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 삶의 한 단면 중 하나 임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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