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에서는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기생수 : 더 그레이>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한다. 서울의 대형 광고판에서 주인공 얼굴이 갈라져서 촉수화된 것만 봐도 징그러워서 작품을 꺼리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류의 작품은 이질적 존재가 자신의 몸을 차지한다는 ‘바디 스내처’ 류의 장르라고 역사가 깊은 장르이니 한 번 어떤 작품인지 살펴보자.
<기생수 : 더 그레이>의 내용은 간단 명료하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모두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이런 식의 독백이 이어지고 동시에 화면에서는 온갖 환경오염, 폭동 등의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하늘(외계?)에서 포자 형태의 생물이 내려와서 지상 위에 안착한다. 이 작은 생물은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인간을 점령하고 다른 인간을 살해하거나 잡아먹는다. 제목에 있는 ‘그레이’는 바로 이 기생생물을 퇴치하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낸 특수부대 조직 이름이다.
드라마는 원래 원작이 있다. 이와아키 히토시라는 작가가 그린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데, 일본에서 맨 처음 잡지에 등장한 게 1988년이다. 필자도 대학생 시절에 만화방에서 라면을 먹으며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이 기생수 시리즈는 공전의 히트를 해서 그 이후로 애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지고 결국 이번에 한국에서도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생수 : 더 그레이>는 장르적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이 <부산행>, <지옥> 등을 연출한 장르물 전문가라서 그런지 기존 작품에 대한 존경도 담겨 있다. 일단, 기생생물이 주인공의 뇌를 잠식하지 못해서, 주인공이 괴물도 아닌 인간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가 된다는 설정이 원작과 똑같다. 주인공 정수인은 죽을 뻔한 위기 상황에서 기생생물이 몸에 들어와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 때문에 기생생물은 수인의 몸을 완전히 빼앗지 못한다. 그래서 둘은 기이한 공생을 시작하는데, 기생생물도 수인이 살아야 자신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수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수인은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생물에게 ‘하이디’(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유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수인과 다르게 원작에서는 기생생물이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를 장악하지 못하고 그의 오른 팔에 안착하게 되어서, 신이치는 몸 안에 들어온 생물을 ‘오른쪽이’라 명명하고 친구가 된다).
<기생수>의 나머지 내용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인간 조직의 상층부로 향하려는 기생수들과 이를 막으려는 그래이팀 그리고 수인 일행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원작의 설정을 가져와서 잘 활용하고, 크리처(괴물)의 묘사나 전투장면도 실감나서 재밌게 볼 수 있는 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에 대한 묘사다. 작품에서는 교회를 뭔가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조직처럼 그리고 있다. 물론 설정 상 교회같은 커뮤니티가 기생수들에게는 필요하기는 하다. 그리고 신자들이 기생생물에 잠식을 당한 상태이니 이상 행동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은연 중에 작품은 세상이 교회에 가진 반감을 슬쩍 슬쩍 내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또 다른 주인공인 설강우의 동생 진희가 기생수들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다. 언니 경희가 이미 기생수에 장악된 상태에서 그것을 모르는 진희는 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기생수 조직의 우두머리인 목사가 나타나 경희가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유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예전에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귀신 들렸다는 이유로 폭행하여 죽게 한 뉴스가 떠오르게 한다. 아주 극히 잘못된 모습인데 사람들은 그걸 머릿 속에 각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튼, <기생수>에서 교회, 교인은 정상인과는 다른 이상한 집단 그리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비춰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교회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리서치를 보면 ‘교회를 신뢰하십니까’라는 질문에 2020년에는 32%가 ‘그렇다’라는 답변을 했는데 2022년에는 18%로 줄어든다. 그 2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어떨까? 더 나아지긴 했을까? 신문기사는 이것의 영향이 교회를 다니는 신도들의 신앙과 행동의 불일치, 배타적 이미지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신뢰 회복에 필요한 것은 50%가 ‘교회 지도자의 윤리적인 삶’이라고 사람들은 응답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이미지도 나빠지고 있다.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는 ‘포용적인’, ‘친근한’이라는 생각을, 천주교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헌신적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세속적인’, ‘배타적인’, ‘위선적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말 ‘세상을 걱정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 걱정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콘텐츠에서 기독교를 곡해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그것은 그들이 일부러 그렇게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대로 그린 것일까? 내가 볼 때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문제는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드라마로, 영화로, 웹툰으로 만들어져서 미디어롤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시청한다는 데 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작품을 보면서 교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저런 게 교회인가?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른데? 내가 아는 교회는 아주 좋은 곳인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너무 좋은 사람들이어서 나도 언젠가 한 번 가 보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끔 우리는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리서치에서 보여준 신앙과 언행의 불일치가 바로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겠다. 교회에서와 세상에서의 모습이 다른 삶이 바로 위선적인 삶이다. 내가 그런 잘못된 이미지에 일조하고 있는지 아니면 변화의 시작점이 될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