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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류지 Jun 25. 2024

열네 번째 챕터의 끝

나를 멈추지 않게 해 준 고마운 것들

    학부과정 8학기, 석사과정 5학기 그리고 박사과정 1학기. 총 14번의 학기를 시작하고 끝냈다. 이제는 이 횟수를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개강 종강 개강 종강...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또 언제까지 내가 이것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는 반복이다. 물론, 이 굴레가 지겹다고 느낄 때도 많았지만, 가끔은 시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설렘, 그리고 마침내 끝을 맞이하며 얻는 성취감도 각각 일 년에 두 번이나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또, 매 학기가 참 다르게 흘러가는데, 그 하나하나가 내가 주인공인 소설책의 한 챕터처럼 생각이 된다. 이번 챕터도 예상과 다르게, 참 새롭게 흘러갔다. 참 특별했던 한 학기였다.


    나는 꽤나 고독했다. 학교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나에게는 동료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학문적으로도 참 고독했다. 이것을 잠깐 나를 스쳐 지나가는 슬럼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시작하고파 하는 나에게 찾아온 기회라고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솔직히는 후자였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도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전자라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대학원생의 주 업무가 되어야 할 연구는 많이 하지 못하고 수업에만 참석한 후 그 누구보다 재빠르게 학교를 나와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넓디넓은 학교에서 나는 큰 답답함을 느꼈고 작은 내 방에서는 나비가 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래도 힘든 와중에 참 감사하게도 내가 멈추지 않게 해 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등굣길이 아주 큰 몫을 했다. 등굣길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매일 학교에 등교하게 해 주었다. 심지어 주말에는 등굣길에만 출석 도장을 찍고 왔다. 이전에는 순환버스를 타지 않고 등교를 하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순환버스를 타면 대략 10분 만에 연구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는 반면, 걸어가면 대략 40~50분이 걸린다. 사실 처음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일찍 학교에 도착해 봤자 뭐 해.'라는 절망이 가득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를 가기는 해야 하니 걸어가서 느지막이 학교에 도착했다. 첫날은 다리가 무척 아팠고 건물에 도착해서는 계단을 오를 힘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처음 보았던 아름다운 봄의 등굣길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무들의 숨결, 아침의 상쾌한 바람. 자연이 주는 선물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등굣길에서 나에게 환하게 인사해 준 봄꽃들이 있었기에 이번 봄이 이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예뻤다. 그렇게 나는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매일 아침 순환버스의 유혹을 이기고 당차게, 씩씩하게 걸었다. 한 달 쯤을 걷다 보니 다리에 근육이 붙어서인지 힘도 덜 들고 건물에 도착하는 시간도 5분 정도 줄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연구실에 앉으면 힘이 났다. 마치 작은 구멍에서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어 나오는 분수처럼, 나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도 '오늘 하루를 멋지게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자신감이 마구마구 분출했다. 

아침 햇빛이 따사로운 날이든, 비가 오는 날이든 그저 좋기만 했던 나의 등굣길. 

 

등굣길에서 많은 꽃을 만났던, 참으로 아름다웠던 이번 봄. 

   


    둘째로는, 단연코 엄마의 존재였다. 이번 연도에 3번은 보았으려나. 하지만 나와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우리 엄마이다. 나는 더워지기 전까지는 하교도 걸어서 했는데, 이때마다 항상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처음 입을 연 날도 있었다. 나에게 특별한 일이 있지도 않았고, 전화를 통해 내가 엄마에게 재미있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그저 항상 그 자리에서 다정하게 나의 전화를 받아주었다. 참 고마웠다. 학교에서 방전된 나는 그렇게 하굣길에서 힘을, 그리고 사랑을 얻었다. 



    셋째로는, '내가 만든 맛있는 것들'이었다. 작고 소중한 나의 주방은 쉴 틈이 없었다. 다행인 건지 나는 요리하고 먹는 것을 참 좋아하기에, 방황이라는 것이 나의 에너지를 완전히 바닥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슬픈 날에도 삼시 세끼는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이때 만이 내가 조금이라도, 아니 온전히 행복할 수 있었기에 그랬다. 매일 아침, 전날 저녁에 코코넛 밀크에 담가두어 잘 불려진 오트밀 위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 자른 과일들을 예쁘게 올린다. 그 순간은 부드럽고 새하얀 코코넛 밀크만큼 나의 마음도 부드럽고 맑아진다. 그리고 밥상 앞에 앉아 첫 입을 '냠' 하고 먹으면 정말이지 과장 하나 없이 행복 한 숟가락을 먹는 것 같았다. 그렇게 행복을 충전하고 집을 나선다. 주중의 점심은 학교에서 먹어야 했다. 육류와 가금류를 전혀 먹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자, 나의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학식을 먹고 싶지 않았기에 항상 도사락을 싸갔다. 하지만 사실, 학교라는 불편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맛있게,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밥 반공기와 전날 저녁에 만든 야채 볶음을 하나의 통에 넣어가서 빠르게 대충 '때웠다.' 12시에 밥을 먹으면, 2시가 되기 전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지는 양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하교가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4시가 가까이 되는 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나는 대부분 코코넛 밀크로 만들어둔 나만의 디저트를 먹었다. 또다시 행복을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그러고는 나만을 위한 저녁을 정성스레 그리고 재미있게 차리고 또다시 '냠'하면서 오늘 생긴 걱정과 힘듦을 씻겨 내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주방에서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오늘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는지도 깨끗하게 잊을 수 있었다. 그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큰 행복을 준 나의 밥상들


하굣길을 더 신나게 해 준 내가 만든 디저트들 


    마지막은 바로 이곳에 글을 쓴 것이다. 영어 표현의 'last but not least'가 바로 떠오른다. 즉, 마지막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것. 사실 이전에도 이곳에 글을 아주 가끔 썼었고, 나만 읽는 일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쓰지만, 이렇게 진지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을 즐기고 있는 데에는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글을 조금씩 쓰다 보니 그 아름다움을 이제 알게 된 것 같다랄까. 글쓰기는 그저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만이 아니었다. 나의 마음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잘 들어주고 또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그럼으로써 그 마음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참으로 감사하다. 


    차가운 공기가 가시지 않았던 추운 3월 초에 시작한 열네 번째 챕터. 어느덧 햇빛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여름이 되어 그 막이 내려갔다. 이 챕터를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준 것들에 감사하고, 또 잘 이겨내 준 나에게 감사하다. 나, 고생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날들도 다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은 붙들어 매고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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