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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llow Sep 17. 2019

안녕, 아프리카

-세상밖으로 시간속으로 2(렛츠북 2019)-

안녕 아프리카     

1. 검은 색을 느낀다.

춤을 춘다. 연회장에서 “하쿠나 마타타(걱정거리가 없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니 케냐 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발을 내밀고 몸을 뒤틀면서, 입에서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춘다. 우리가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라고 으스대지만 흑인들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흑인들을 보면 걷는 것 자체가 율동이다. 케냐 혈통인 오바마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을 보면 두 팔을 허리 가까이 올리고 한 발을 뛰는 듯하여 꼭 춤을 추는 모습니다. 마사이 족이 사는 부락에 갔을 때에도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뛰어오르는 춤을 추면서 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였다. 춤은 그들 생활의 일부이었다.

아프리카의 색깔은 땅을 보면 황토색이겠지만 사람의 사는 모습은 검었다. 처음 가본 아프리카, 동물의 왕국이며 인류가 탄생한 지역이라는 멋있는 인상대신 가기 전에도, 갔다 온 이후에도 검다는 인식을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의 피부색이 검다는 것이 아니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선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야생동물이 무리지어 살고 있는 ‘암보셀리‘라는 사파리까지는 7시간이 지프차로 걸린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다보면 멀리 모랫바람이 회오리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미국 남부에서 보았던 토네이도가 지나간 흔적, 무언가 예리한 칼로 난자하여 모든 것이 널브러진 모습을 연상하였지만 그같은 강력한 회오리가 아니라 먼지들이 가볍게 빨려 올라가는 현상이었다. ’암보셀리‘는 스와힐리어로 ’먼지‘라는 뜻이다. 먼지라는 이름이 부쳐진 것을 보면 바람이 휘말려 올라가는 자연 현상이 매우 빈번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빨간 담요를 두른 모습의 흑인 무리들이 보였는데 이들이 보고 싶었던 마사이 족이었다. 마사이 족은 군락 울타리 내에 촘촘히 집을 만들어 살고 있었는데 소똥과 진흙으로 집을 만든다고 한다. 그 군락으로 들어가니 온갖 곳에 소똥이 뒤범벅되어 있었고 어느 곳에서는 방금 배설하여서인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콧물을 질질 흘리는 아이들 머리를 파리들이 맴돌고 있었다. 사는 모습을 보고자 흙집 안으로 들어가니 환한 대낮에도 암흑이었다. 조그만 구멍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만 그 집에서 불을 떼어 먹을 거리를 익히고 뒤엉켜 살면서 부부관계를 하여 아이도 낳는다. 동물의 생활과 거의 다른 바가 없는 인간의 생활이기에 남녀관계도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군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구역이라는 개념이 없다. 동물의 대규모 이동으로 유명한 세렝게티와 암보셀리 지역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계절에 따라 먹을거리를 좇아 탄자니아와 케냐를 넘나드는데 이를 사냥하는 마사이족도 국경 없이 넘나들고 있다. 이들에게는 영토의 개념이 있을 리 없고 단지 먹이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뿐이다.      

아프리카의 미래가 있을까?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의 위생과 교육이 마련되어야 할 터인데 그런 환경이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지리라는 데는 회의적이다. 아프리카의 미래를 위해서 뛰어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 앞에 가로놓인 것은 엄청난 부정부패이고 이것은 탐욕스러운 서구 개발론자와 결탁되어 있다. 미래를 개척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패사슬을 끊는 것이다. 어느 부족을 대표하는 족장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 통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할 의지도 계획도 없고 자신 가족이나 부족의 이해를 우선시할 뿐이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부패가 만연하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빈부의 격차는 자연히 크게 된다.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적도기니는 참으로 가난하다. 인구 68만 명의 이 조그만 나라에 매일 40만 배럴의 석유가 생산된다.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지만 지도계층의 독식으로 최빈국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통계 수치상으로는 1인당 연간 소득이 2만 불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만 재산이 돌아간다. 일부 계층만 배부를 뿐 국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빈부의 격차가 어디 나라에 비견하여도 크다. 이러한 사회현상의 색깔을 나는 검정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2. 아프리카 인들이 사랑하는 지도자

 50세 이상의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에티오피아 하면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를 떠올린다. 그는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로 시바 여왕과 솔로몬 대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가 세운 3,000년 역사의 에티오피아 제국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풍성한 인자한 모습인데다 한국전 당시 블랙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약 6,000명의 황제 친위대를 파병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준 나라의 황제이어서 우리는 항상 그를 고맙게 생각하여 왔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에티오피아 인들도 당연히 셀라시에 황제를 존경하고 사랑하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지에서 만난 에티오피아 인들이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셀라시에 황제의 통치 기간중 일부 권력층에만 혜택이 돌아갔을 뿐 일반 서민들은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멜레스 총리가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한다. 1995-2012년간 통치한 그의 초상화가 거리와 건물 곳곳에 걸려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이야기할 정도로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셀라시에 황제 이후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의 통치기간 동안 지역 및 종족으로 나누어져 분쟁이 빈발하여 국가가 분열되었다. 멜레스 총리는 이러한 얼룩진 국가의 내전을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서민의 생활을 늘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는 국민들의 의료지원을 위하여 명성교회 목사에게 병원 설립을 간곡하게 요청하고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완공되어 운용될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로 명성병원은 에티오피아에서는 가장 첨단의료기기를 갖춘 병원으로 에티오피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탄자니아 수도인 다르-예스-살람의 관문은 줄리어스 니에레레 국제공항이다.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으로 아프리카에서 비동맹을 대표하는 지도자이다. 비동맹은 우리에게 친 공산화 움직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가운데 어느 편도 치우치지 않겠다고 하는 비동맹이라는 슬로건은 개발도상국에게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비동맹 국가들은 공산권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친 공산화 경향을 보였으며, 김일성은 국제적 도움을 얻어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어 비동맹에 적극적이었다. 반공을 표방하면서 군사력이 열세이었던 우리로서는 찬성할 수 없는 국제적 움직임이었다. 이비동맹 움직임의 중심인물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쿠바의 카스트로, 유고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와 함께 블랙아프리카에서는 단연코 탄자니아의 니에레레 대통령이었다.

우리와는 노선을 달리 하였지만 그는 탄자니아의 존경받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120여개 부족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탄자니아를 영국으로부터 해방시킨 독립과 경제발전의 영웅이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지 언어를 그대로 이어받아 모국어로 사용하였으나 그는 아프리카에서 널리 쓰이는 스와힐리어를 공용어로 정하고 학교에서 이를 교육시켜 국민들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보면 그는 탄자니아의 세종대왕이었으며, 그를 향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탄자니아 공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3. 명나라 정화가 간 지역, 케냐     

지금부터 무려 600년 전에 중국인들은 아프리카에 그 발자국을 남겨 두었다. 그 때가 명나라 영락제 시대인데 중국인들은 명청 시대를 통하여 자신들이 명실 공히 세계의 중심이었다고 주장한다. 중국 영화(榮華)의 한 흔적은 정화(鄭和)의 대항해이었다. 우리는 15세기말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원정이나 콜럼버스의 미국대륙 발견이 더 익숙하지만 정화의 항해가 시대나 규모면에서 훨씬 앞서 갔다.

서양인들의 항해보다 무려 1세기나 빠른 15세기 초반 정화는 7차례나 동남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원정을 떠났다.  바스코 다 가마가 진두지휘한 규모가 배 3척, 승무원 170명이고 콜럼버스가 지휘한 것이 배 3척, 승무원 88명이었는데 반해 정화는 7차례에 걸쳐 대형함선 62척에 27,800여명까지 지휘하였다고 하니 그 차이를 가히 짐작할만하다.

정화는 5차 원정때 케냐 몸바사 항의 북동쪽에 위치한 말린디에 1418년 상륙하였다. 당시 기린을 가져갔으며 그 기린을 영락제에게 바치는 장면을 중국 화가가 그렸다고 한다. 이후 중국인들은 기린을 영물(靈物)로 대접하고 기린을 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청나라에 다녀 온 조선 학자의 기록에도 나온다. 정화의 아프리카 진출을 보게 되면 당시 증기선도 아닌데 어떻게 그 멀리 갈 수 있었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무역풍의 영향 때문이었다. 매년 북동 또는 남동 무역풍이 불어 배가 순풍을 타고 쉽게 이동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해류를 타고 사람들의 이동도 많이 일어났다.

탄자니아의 잔지바르(Zanzibar) 라는 지역은 유명한 관광지로 특히 서양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인도양의 쪽빛 물결은 너무나 아름다워 발을 담그고 한참동안 서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서글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예무역을 거점지로 유럽식민지를 경영하던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원주민을 납치하여 이곳에 묶어두었다가 아라비아 지역으로 팔아넘기던 곳이었다. 마사이 족이 유명해 진 것은 야생동물을 맨 몸으로 잡기도 하였지만 용맹스러워 노예 무역상들이 감히 잡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유달리 인도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진데 그 이유도 무역풍을 타고 인도에서 건너와 정착했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을 생각하면서 부여를 방문하여 금강을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나당 연합군에 백제군이 패퇴하고 의장왕이 포로로 잡혀간 이후 일본에서 2만 명이 넘는 원정군이 의장왕의 아들 부여 풍과 같이 왔다는 모습을 연상하였다. 당시에 멀리 일본에서 백제로 올 수 있었던 것은 발달된 배보다 바람의 흐름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연 해류가 어떻게 흐를까 생각하곤 하였다. 백제가 일본과 교류가 빈번한 것은 해류영향 때문이다. 실제로 부산에서 쓰시마 사이는 현해탄으로 바닷길이 매우 험한 반면 바닷바람 덕택으로 쓰시마에서 거제도나 전남 해안가로 가기가 더 쉬웠다고 한다. 왜구들의 남해안 약탈이 유독 심했던 이유와 함께 조금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울릉도에 호남 출신의 사람이 40%라고 하는데 이도 해류 때문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해외에 대규모 원정단을 파견한 목적은 주변 국가를 굴복시켜 나라의 위세를 알리고 서양의 보물을 획득하려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항해를 갑자기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해양무역이 강해질수록 지방 세력이 급히 부상하여 중앙정부를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해양무역의 퇴조는 중국이 그 경쟁력을 잃어가는 징조였는데. 이후 중국이 아프리카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가진 것은 600년 이후인 모택동 집권시절 비동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이다.     


4. 카렌 블렉센의 아프리카 사랑

나는 카렌 블렉센 기념관 자리에 서서 람세스 2세라는 소설을 읽은 후 흥분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혀 몰랐던 이집트의 화려했던 영화(榮華)를 람세스 2세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 감흥을 잊지 못하여 룩소와 카이로를 그토록 방문하고 싶었고 그 땅을 밟았을 때 3000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을 느꼈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야성과 노예의 애환을 간직한 아프리카 대륙의 아름다움을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라는 소설과 메릴 스트립(M. Streep)과 로버트 레드포드(R. Redford)가 열연한 영화로부터 느꼈다.

이후 아프리카 하면 나는 어떤 풍경을 떠올렸다. 광활한 대지에 바오밥 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 가운데 낮에는 뜨거운 공기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석양 무릎엔 저 멀리 산야에 뚝 떨어지는 해가 우리 인생을 처연케 하는 모습, 그 사이로 검은 청년 하나가 아랫도리만 걸친 채 맨발로 창 하나만을 지니고 얼룩말을 좇아가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바오밥 나무를 보면서 왠지 모르는 동질감을 느꼈다.

카렌은 막 결혼하여 남편과 케냐로 왔는데 꿈에서나 그리던 자유를 찾았다고 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뜨거운 애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커피농장을 경영하던 그녀는 초기에 성병에 걸리기도 하고 남편과의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하였다. 이후 전문 사냥꾼과 열애를 하였으나 그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미쳐 커피 사업이 망하여 덴마크로 돌아왔다. 그녀의 케냐 생활이 순탄치 않아 잊고자 할만도 할 터인데 정작 그녀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이를 연상하면서 쓴 글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였다. 그녀의 작품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으나 ‘분노의 포도’ 저자인 존 스타인벡에 밀려 아쉽게도 수상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아프리카 원주민에게서 뜨거운 애정을 느꼈으며, 아프리카 공기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커피농장 운영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머리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뜨거운 열대 공기가 스며든 몸으로서 소설을 썼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은 이제 멀리 사라지고 그녀가 떠난 저택에는 사바나의 광활한 배경을 섬세하게 묘사한 서정적인 분위기만이 남아 있었다. 나이로비 도심을 벗어난 외곽에 있는 카렌 블릭센 기념관에서 그녀의 흑백 사진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에 매혹되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널따란 뜰에는 당시 사용했던 트랙터와 철제 농기구가 있고 눈에 뛰지 않는 호젓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커피농장에서 활용했던 커피 원두 가공 기계류와 농기구들이 뒹굴고 있었다. 
 
 5.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와 커피

아프리카는 인류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탄자니아의 인류학자가 설명하는 것은 자못 흥미롭다. 아프리카 대륙의 형태를 보면 동서가 다르다. 수백만 년 전 지형의 변화가 일어나 킬리만자로 산이 융기하면서 서쪽은 비가 많이 쏟아지는 열대림으로, 동쪽은 강수량이 부족한 긴 풀과 관목이 자라는 지형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변화가 인류의 발생을 가져왔다고 한다. 다른 동물과 같이 네 발로 움직이던 원시 인류의 조상이 관목으로 인하여 숲에 자신을 숨기기가 어려워지고 강한 동물로부터 위협을 느껴 목을 쳐들고 주변을 살피는 행태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두 발로 서게 되면서 원시 인류의 탄생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이후 인류의 조상이 이곳으로부터 북상하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개골의 부피도 크지 않아 현재의 1000-1200cc와는 많이 차이가 나는 530cc-800cc 정도로 최초 원시인류인 호모 하빌리즈의 태생지라고 한다. 그 두개골을 보니 소위 주먹만 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으며 이후 머리가 작은 사람을 보면 원시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티오피아에 간다고 하면 커피 선물을 기대하는데 실제로 커피가 처음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커피라는 말도 커피나무가 야생하였던 카파(Kaffa)라는 지역에서 연유하고 있다. 어느 목동이 먼 곳까지 염소 떼를 몰고 갔는데 염소들이 어떤 나뭇잎과 열매를 먹은 이후 더 껑충거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먹어보니 기분이 들뜨게 되어 이 열매를 퍼트리면서 커피가 인류의 커다란 기호식품으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호텔에 보니 한 편에 진한 검은색의 여인이 생두 커피열매를 프라이팬에 올려 숯불에 볶은 후 이것을 절구에 넣어 빻은 다음 주전자에 커피 가루를 넣고 끓여 손님들에게 시식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커피를 만드는 이런 절차를 에티오피아의 커피 세리모니라고 하는데 통상 30여분 이상이 소요된다. 원산지이다 보니 에티오피아의 커피는 세계 일급의 커피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다른 커피와 맛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6. 아프리카에서 얻는 지혜

아프리카 하면 내전, 가난, 기아, 무지, 독재, 부패 등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고 미래가 없는 지역이라고 느낀다. 깨끗한 물이 없어 면역력이 낮아지면서 풍토병에 걸리기 쉽고 아프게 되면 의료장비나 인력이 없어 삶을 비교적 짧게 마치게 된다. 그래서인지 우물파기 운동이나 의료지원에 대하여 그들은 매우 고마워한다. 우리의 여러 자선 단체가 탄자니아와 에티오피아에 병원을 지어 기증하였다. 이들 병원을 방문하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의사와 간호사를 만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고 한국의 의료지원에 대하여 참으로 고마워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연에서 체득한 지혜는 결코 우리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의 속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생활화하고 있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라는 속담을 아프리카에 다녀온 이후 자주 인용하는 문구가 되었다. 나아가 “풀을 잡아당긴다고 해서 빨리 자라진 않는다”라던가 “자연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잠시 빌린 것이다”는 말에서 그들의 겸허함과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아프리카인들에 이제 한국은 널리 알려져 한국인이라고 하면 “빨리 빨리” 라고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쳐 올리지만 오히려 계면쩍어진다. 그들이 손가락을 내 보일 때 아프리카 말로 “폴레 폴레(천천히 천천히)”라고 화답하게 되면 환한 웃음이 터진다.

이제 블랙 아프리카에도 문명 발전의 흐름이 불어오는가? 아직은 속단하긴 어렵지만 전쟁이나 기아의 물결이 빠져나가고 대신 최근 빠른 경제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교육도 늘어나고 풍토병에 의한 사망도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핸드폰과 같은 문명의 이기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하여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검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였다고 하면 가지 못할 곳이나 인간 이하의 삶을 이루고 있는 곳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에티오피아 수도에서 나타난 판자촌 모습은 1950년대 전후 사진에서 보았던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여 눈길을 주기조차 싫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는 자연의 강렬함이 아직 남아 있다. 지금보다 훨씬 낙후되었던 20세기 초반 카렌 블릭센은 아프리카 땅 위의 공기가 타오른 불꽃과 같았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아프리카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보고 아프리카의 코로 아프리카를 맡았으며 아프리카의 귀로 아프리카를 들었다고 한다. 검은 색은 인류 문명과 동떨어진 낙후함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같이 어울리는 색이다. “하쿠나 마타타”라는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흐늘대는 아프리카 인들의 모습이 아프리카의 흑진주이고 인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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