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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llow Sep 17. 2019

오클라호마

- 세상밖으로 시간속으로 2(렛츠북 2019)-

인디안의 애환오클라호마     

비행기가 오클라호마시 공항에 착륙하기 위하여 접근할 때 창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펌프제트라고 하는 석유를 뽑아내는 시설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펌프 제트가 석유를 뽑아내기 위해 아래위로 움직이는 모습이 메뚜기가 뛰는 모습과 같아 이것을 메뚜기라고 부른다. 내륙에 위치한 오클라호마 주에서 19세기 말에 석유가 처음 발견된 이래 석유 채굴이 주요 산업으로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크고 작은 펌프제트를 볼 수 있어 알려지지 않은 석유도시라고 느낌과 함께 유가에 따라 춤추는 경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산업의 다변화가 절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 쿠웨이트에 근무할 당시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고 보면 골프채가 석유찌꺼기로 검게 변할 정도로 지근거리에서 석유에 파묻혀 있다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오클라호마는 인디언 말로서 붉은색의 민족이라는 뜻인데 그러고 보니 인디언들 사진을 보면 불그레한 점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주를 지도에서 유심히 보게 되면 부엌에서 쓰는 프라이팬과 같이 생겨 별칭으로는 Panhandle State라고 하는 별칭이 있다.      

오클라호마는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지나가는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토네이도로 유명하다. 강우량이 많아 수만 년 전에는  숲으로 뒤덮인 지역이었으나 로키 산맥이 융기하면서 구름이 넘나드는 것이 어렵게 되면서 기후가 건조하게 되고 간혹 산맥을 넘어온 찬바람과 멕시코 만에서 북진하여 온 뜨거운 바람이 오클라호마에서 호적수로 만나 갑작스러운 기후변화를 일으키면서 토네이도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네이도가 할퀴고 가면 워낙 인명과 재산 피해가 크다보니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기후센타가 발전하고 자연히 기후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여도 아직은 토네이도의 피해에서 비껴나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기술의 발전으로 일부의 재산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명 피해는 거의 예방할 정도로 잘 대응해 나가고 있다. 일전에 이 지역에 살았던 한인은 30년 전 어느 휴일, 2층 거실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자꾸 깨우면서 간식을 사달라고 하여 데리고 나간 사이에 토네이도가 불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한다. 상가 건물 지하에서 간신히 토네이도에서 벗어나 피하고 돌아오니 자신이 자고 있던 2층이 날아가고 없어져 황당하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생명을 구했다는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어제 일어난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장은 달랐다. 어느 전직 시장은 30년 이상 이곳에 살면서 토네이도를 본 것이 한번 뿐이었는데 언론에서 너무 과장한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사실 언론의 속성상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실제로 겪은 사람 역시 그 기억이 뚜렷이 남아 있다 보니 실감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조금은 과장하게 되어 모르는 사람들은 토네이도를 실제 이상의 무서운 자연현상으로 기억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한국이나 중동과 연결시켜 보면 우리에 대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까 하는 것을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우리는 남북한 대치상황에 너무 익숙하여 북한의 실제 도발한 이후에도 느긋한 반면 외국인들은 북한의 핵개발, 북한주민의 탈출 등의 소식을 접하면 한국이 매우 위험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된다. 토네이도의 경우도 분명히 무서운 자연 현상이기는 하나 실제로 피해를 줄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어 과장된 느낌도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 지역이 기후적으로는 그다지 우호적이 않다. 토네이도뿐만 아니라 가뭄과 더위, 먼지바람 등으로 사람들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후이었다. 역사 박물관에는 20세기 초반에 희검은 먼지 폭풍(dust bowl)이 어느 마을을 덮치는 사진이 있어 폼페이시의 최후를 연상하게 된다. 사진 상에는 집집마다 4-5 센티미터 정도 먼지로 쌓인 것을 알 수 있고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천식 등 건강상 문제를 겪었으며 이 여파로 오클라호마의 경제가 매우 침체되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시작은오클라호마 주로 기후와도 관련이 있다. 모래바람으로 농사를 망치면서 자신의 고향을 등지고 약속의 땅인 캘리포니아로 떠나지만 기업화된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富)만을 키우려는 인간의 탐욕을 고발하고 있다.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점인 1939년을 배경으로 하였는데 석유로 인하여 일부의 사람은 부를 모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소박한 농부로서 오클라호마의 척박한 기후로 인하여 떠나야 할 정도로 기후는 결코 녹록하지가 않았다. 약속의 땅인 캘리포니아에서 노동자들은 허기졌지만 농장주들은 감자를 강에 버리고 오렌지에는 석유를 뿌려 눈만 멀뚱멀뚱 보고 먹지를 못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감과 함께 분노의 포도가 수확기와 함께 익어간다는 표현에 나의 눈도 충혈되어 튀어 나올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런 곳이지만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는 바위에 사람의 기록을 발견한 것은 놀랄 만하다. 그 바위에 해독하기 어려운 12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1012년 11월 11일에 바이킹 족이 도착하여 새긴 것이라고 한다. 토네이도라는 자연재해가 수시로 왔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테러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테러하면 뉴욕의 무역센타 빌딩이 그대로 내려앉은 2001년 9.11 사건을 연상하지만 그 이전에는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건물 내부가 대부분 파괴되었던 사건이 미국인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1995년 4월 19일 폭탄 꾸러미가 터지면서 연방건물이 내려앉으면서 건물 내의 보육시설에서 놀고 있던 168명의 희생자 중에 19명의 어린이도 포함되어 유명을 달리하였다. 건물이 서 있던 장소에는 폭발 당시의 시간인 9:02을 나타내는 추모시설과 함께 희생자를 위한 168개의 의자를 추모비로서 만들어 놓았는데 19명의 아이를 위한 자리는 조그맣게 만들어져 있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미국 지명중에서 영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단어의 상당부분이 인디언이 사용하던 말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텍사스는 친구라는 뜻이고 앨라배마, 아이다호 등 여러 주의 이름도 인디언 부족 이름의 하나다. 쿠웨이트에 근무하면서 사막기후여서 푹푹 빠지는 곳도 있고 비좁은 지역에서 과속도 심하여 중동에서 심사숙고하여 산 차가 지프차 종류인 체로키(Cherokee)였는데 이 역시 강력했던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미국 전역이 인디언과 관련이 있겠지만 오클라호마 주가 인디언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유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오클라호마를 인디언의 집단 거주지로 지정하여 19세기 후반에 곳곳에 살던 인디언들을 이곳으로 내몰았다. 이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뒤로 하고 멀게는 3200키로나 되는 거리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하며 이 대이동을 눈물의 궤적(Trail of Tears)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 상에 어린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측은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경우도 비슷한 역사적 전례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1937년 스탈린의 조치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인디언을 이 지역에 몰아넣었다가 이제는 백인들을 모으기 위하여 또다시 신기한 게임을 하였다. 예전 전래동화에서 자기가 가는 만큼 땅을 주겠다고 하니 어느 사람이 숨넘어갈 정도로 뛰어갔다가 땅은 차지하였으되 생명을 잃어버린 우화가 생각난다. 이러한 것이 우화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오클라호마에서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이곳에 개척자들이 거주하도록 하기 위하여 게임 법칙이라는 것이 어느 날을 정하여 총을 쏜 이후 자신이 가는 만큼 땅을 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항시 그러하듯이 어떤 사람은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미리 떠나 자신들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규칙을 어기기도 하였는데 얼마나 많이 차지하고 싶었으면 오클라호마 주의 이름이 더 빠른 주(Sooner State)라고 명명될 정도로 사람들의 욕심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정작 이 땅이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은 미국 전역에서 이곳으로 강제로 이주해야 했는데 다시금 그 땅조차 빼앗기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미국 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인지 인디언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할 뿐만 아니라 보조금을 주고 도박 사업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인디언들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많은 돈을 모아 비교적 윤택하게 생활한다고 한다. 다만 그들이 불과 2세기만에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인디언에 관한 기사를 오클라호마의 대표적인 신문에서 찾다가 오히려 한 면을 뒤덮은 총기 판매광고가 눈에 더 들어 왔다. 총기휴대는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문안에 더하여 권총이 300불에서 시작되고 라이플은 125불에서부터 4000불까지 다양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이라크 파병으로 지난 10여 년간 약 4500여명의 미군이 피살된데 반하여 2001년 9.11 사건 이후 거의 같은 기간에 17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총기사건으로 피살되었다고 하니 총기휴대가 매우 큰 사회적 관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로서도 한인2세인 조승희 사건으로 사회적인 관심을 크게 유발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총기휴대를 불법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반응이다. 헌법 수정을 위해서는 2/3이상의 의원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보수층에서는 총기휴대가 그나마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입장이어서 수정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학 내에서도 총기휴대를 합법화하자는 논의가 최근 텍사스 주 의회에서 있을 정도이었으며 실내체육시설 입구에 총기휴대를 금지하는 내용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을 정도로 총기가 미국 곳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오클라호마에도 어김없이 참전용사가 있어 그들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이제 80줄을 넘고 보니 그동안 동고동락을 하던 동료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 이제 남은 사람이 얼마 안 된다고 하면서 서글픈 표정들이다. 어느 참전 용사는 18살 나이로 일본에 파병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4일, 갑자기 한국전에 차출되었던 기억을 되새긴다. 자신의 동료가 옆에서 쓰러지는 가운데 자신은 운 좋게도 살아남아 어디인지도 모르고 명령에 따라 진군해 나갔는데 이제 돌이켜보면 그 도시가 인천, 서울이었다고 한다. 거침없이 북진하다가 중공군을 만나 다시 후퇴하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50년 유난히 추웠던 한국의 겨울이라고 과거를 회상한다.     

귀국할 때 미국 국민들의 반응에 대하여 문의하니 의기소침해진다. 트루먼 대통령이 급히 파견하다보니 의회 승인을 받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그러하다보니 전쟁이 아니라 치안조치(Police action)로 분류되었던데 더하여 미군의 참전 이후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다 보니 귀환시 환영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서도 한국전에 참전하였다고 하면 어디에 잠시 여행 다녀왔다는 농담을 하는 정도로 대부분 한국전에 대하여 잘 모르다보니 잊힌 전쟁이라고 스스로도 자조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최근 이라크 전에서 귀환하는 장병을 공항에서 환영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우리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여러 문구와 함께 비행장에서 나오는 장병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하여 환호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을 뿐만 아니라 같이 미국 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뭉클해졌다. 특히 태권도를 배우는 학생들이 한글이 새겨진 도복을 입고 환영장에 있어 미국인 사범에게 물어보니 태권도가 애국자나 윗사람을 섬기는 정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승급이나 승단 심사를 받기 위하여 반드시 이러한 환영식장에 나온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우받지 못하였던 한국전 참전용사에 대한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오클라호마를 떠나면서 복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던 것은 불과 200년 사이에 일어난 여러 정치적인 변화 때문이다. 불모의 땅, 열악한 기후환경의 지역인 이곳으로 인디언을 내몰았다가 그곳에서 석유가 나오면서 각지에서 사람이 모여들고 이들도 모자라 먼저 오는 백인들에게 땅을 주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럼에도 자연은 사람들에게 결코 자비롭지 못하여 농장 노동자들은 땅을 버리고 서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상황이 연상되어 착잡한 마음으로 공항 인근에 석유를 퍼올리는 펌프제트를 바라보면서 비행기 트랩에 다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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