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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llow Sep 17. 2019

멀고먼 중앙아시아 1

비단길과 흉노족

멀고 먼 중앙아시아      

1. 비단길과 흉노족

아주 먼 지역을 여행하고 온 느낌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비행시간은 10시간 이상 걸리는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는 여행 거리는 그 절반에 불과하고 직항로가 있음에도, 브라질이나 남아공보다 더 먼 지역을 다녀온 것 같다. 사실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는 잘 모르니까 우선 멀다는 느낌을 갖다가도 다녀온 후에는 아, 생각보다 가깝구나 하고 친근함을 갖게 된다. 그러나 10여 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고 다시 다녀왔음에도 여전히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아직도 중앙아시아 사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모르면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 아닐까 한다. 이 지역은 여전히 내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내가 중앙아시아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어떻게 다를까? 19세기 조선은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외국인들에게 멀었을 것이다. 1894년부터 4차례나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들추어보면, 교육받은 영국인들조차 조선이 적도나 지중해 또는 흑해 부근에 있을 거라고 추측할 정도로 조선에 무지했다. 19세기 가장 국제화된 영국인들에게 멀다는 범위가 지중해와 흑해인데, 그 너머의 국가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지사 아닌가. 

그렇다면 21세기 세계가 하나라는 이때라고 해서 과연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우리가 중국만 지나면 있는 6시간 비행거리의 중앙아시아를 모르는 것에 비춰보면 외국인 역시 우리를 잘 모르고 있을 것 같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앙아시아는 상당히 열린 지역이었다. 전쟁이 수없이 일어나고 강력한 민족이 빈 땅을 차지하는 불운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광대한 스텝(steppe)과 농경지가 많고 커다란 산이 없다. 서쪽으로 카스피 해, 동북쪽으로 천산산맥이 있는 정도여서 진입하기에 좋았고, 이런 이유로 강한 민족이 서로 땅을 차지하는 통에 어느 지역보다 다양한 인종이 뒤섞였다.

중앙아시아는 흉노족과 돌궐족 등 유목민이 옮겨 다니던 지역이었다. 헤로도토스의 명저 <역사>를 보니 스키타이 족이 유목 민족의 원조라고 한다. 현재의 남부 러시아 지역에서 발흥해 BC 8~1세기까지 유럽지역을 휩쓸었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족은 중앙아시아를 통해 그들의 문화를 흉노에게 전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키타이의 이동이 동진이라면 흉노의 이동은 서진이었다. 몽골지역에서 발원한 흉노는 진, 한나라를 공포에 떨게 하면서 계속 서진해 훈족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3~4세기에는 카스피 해를 지나 유럽에도 커다란 전율을 일으켰다.

이 두 유목민족의 인종적 차이를 보자. 흉노족은 동공이 검고 눈이 작으며 턱수염이 없다. 스키타이 족과 관련된 투르크 족은 동공이 남색이고 눈이 크며 턱수염이 있다. 이 두 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유목 기마민족은 동서양의 문화를 옮기고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킨 주인공들이다. 말을 타고 움직이기 때문에 청동제 고삐·재갈·등자(鐙子) 등을 개발했으며 페르시아, 그리스의 공예품과 장신구를 동양으로, 알타이 황금과 중국의 직물을 서양으로 소개했다. 유목민족의 영향으로 비단길이 형성되면서 이집트 지역의 유리 문물과 중국의 비단이 교환됐는데, 특히 도자기가 유럽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비단길을 보면 북경-장안-돈황을 지나 사마르칸트에서 나누어져 북부의 테헤란-로마로, 남부의 바그다드-알렉산드리아로까지 이어졌다.

흉노족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중국은 BC 2세기에 북쪽 전체를 성으로 둘러쌓는데, 이것이 이제는 중국을 대표하는 만리장성이 되었다. 흉노가 중앙아시아를 지나 홀연 훈족으로 동유럽에 출현하니 당시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 역시 두려움에 떨었다. 이태리 베네치아 부근의 섬에 가면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의 석조 의자가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까지 동양의 후예가 세력을 펼쳤다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앙아시아에서 3000년의 역사 도시, 사마르칸트는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뒤섞인 대표적인 곳으로, 비단길 중간에 위치해 동서양 문화의 교류가 많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차지하던 중앙아시아는 BC 10세기~AD 8세기까지는 이란계 소그디아나 인이 거주했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또한 BC 329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소그디아나를 공략한 바 있다. BC 209~174년까지 전성기의 흉노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그 세력을 펼쳤다. 이 시기에 중국의 장건(BC 2세기)과 반초(AD 1세기)는 교류를 위해 이 지역을 방문했다.

8세기 당나라의 고선지가 이슬람 세력에 패배한 이후 아랍계가, 11세기에는 터키계가 사마르칸트를 지배했으며, 1220년에는 몽골이 차지했다. 14~15세기에 티무르 제국이 차지한 후에는 아랍계가 장악했다. 1868년 러시아 제국이 점령한 이후 소련의 통치가 쭉 이어오다가 1991년 우즈베키스탄의 영토가 되었다. 사마르칸트를 예로 들었지만 중앙아시아 전체가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운명을 겪었다. 소위 세력의 각축장에는 길이 나기 마련인데, 이 길이 비단길(실크로드)로 동쪽의 진나라 수도 시안에서부터 서쪽의 이스탄불에 이른다. 그 중간의 요충지에 우즈베키스탄의 고도인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시겐트가 있다.

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중앙아시아는 닫힌 지역이 되고 말았다. 특히 20세기 소련과 중국이 국제사회와 문을 닫으면서 이 지역 역시 세계 어느 곳보다 가기 어려운 국가가 되었다. 또한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증기선의 개발로 국제 해양로가 다양화되고, 20세기 항공로가 개방되면서 육로로 동서양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던 중앙아시아는 변방으로 처지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의 와해 이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독립되면서 중앙아시아의 중심도시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지만 예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1500년 이상 교역의 중심이었던 곳이 150년 동안 갇혔다가 최근에야 다시 개방되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먼 나라이다.      

중앙아시아 북부인 카자흐스탄은 여름에는 시원하나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릴 정도로 춥다. 반면 남부인 우즈베키스탄은 물이 풍부한 가운데 여름에는 30~40도로 올라가 농사가 잘되는 지역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카자흐 지역에는 흉노족과 같은 유목민, 우즈베키스탄에는 이란계의 소그드 족 같은 정착민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땅 크기로 보면 중앙아시아 5개국이 한반도의 18배(남한의 40배)나 되는데 반해, 인구는 6,500만 정도로 한민족의 8,600만에 미치지 못한다.

중앙아시아의 뒤엉킨 역사로 여러 인종이 뒤섞이게 되면서 인종의 전시장이라는 미국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페르시아계·몽골계·터키계·러시아계·중국계 등 각 시대의 내로라하는 세력의 핏줄이 흐르고 있다. 지역적으로 약간 차이는 있어 북부의 카자흐스탄에는 터키·몽골·러시아계가 많고, 남부 우즈베키스탄에는 이란·터키·유럽계가 많다. 그럼에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아 거리에서 만난 학생에게 차이를 물어보니 카자흐스탄 계가 조금 가무잡잡하고 눈꼬리가 올라간 반면, 우즈베키스탄 계는 하얀 피부에 눈썹이 진하고 눈꼬리가 쳐져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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