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레즈 국제 커플입니다.
영국인이자 생물학적 여성인 B와 한국인이자 생물학적 여성인 나. 우리는 1년 7개월째 만나고 있다. '만나다'를 국어사전에 검색해 보면 이런저런 뜻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끄트머리에서는 '만나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인연으로 어떤 관계를 맺다.'
나와 B는 인연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 어떤 관계는 연인 관계다.
그렇다. 우리는 1년 7개월째 연애를 하는 레즈비언 국제 커플이다.
어릴 때부터 내가 여자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던 나였기에 당연하게도 (물론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B가 처음 사귀는 여자 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사람이 아닌, 살아온 환경도 각자의 문화도 다른 외국인과 연애하는 것은 내 인생 처음이었다. 심지어 어느 정도 유전적 특징이나 문화가 비슷한 동양인도 아니고 유전적, 문화적으로는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든 파란 눈의 서양인이라니. 한국에서 2n년 동안 거의 벽장에 가까운 반벽장*으로 살아온 내게는 상상에도 없던 일이다.
* 부모님, 형제, 친척, 직장 동료에게는 커밍아웃을 안 했지만 믿을 만한 친구들 몇 명에게는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에 반(half) 벽장이라고 표현했다.
생김새와 문화 차이뿐이라면 양반일 거다. 나의 연인이 한국인이 아니라면, 혹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산 하나 더. 모두 예상했듯 언어 차이 되시겠다.
B와 내가 주로 소통하는 언어는 '영어'다. 국제커플 중에 꼭 한쪽이 영어 원어민이라고 해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우리 커플에게는 영어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B는 모국어가 영어이며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를 중급-고급 정도로 할 줄 안다. 하지만 한국어는 할 줄 모른다. 나는 모국어가 한국어이며 영어를 할 줄 안다.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는 초록 부엉이 어플로 기초만 깔짝거렸지 거의 못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언어 능력의 교집합이자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
* 일본어는 요즘 배우고 있어서 기초 수준보다는 조금 낫다. 정말 쪼금. 타이니 빗.
제 아무리 영어가 세계 공용어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한국식 영어 교육을 받고 한국어를 쓰며 자란 내가 100% 원어민처럼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자칫 내 의도가 아닌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칫 상대의 의도를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었다. 깊은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서로의 연인이 서로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밖에 B는 대외적으로 오픈한 '오픈리 퀴어'로 부모님, 형제 모두 B의 성정체성을 알고 있는 반면 나는 소수의 친구만 나의 비밀을 아는 '반벽장 퀴어'로 가족들에게는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
외모 차이, 문화 차이, 언어 차이, 거기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사회적으로 오픈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까지.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혹은 B가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 1년 넘게 B와 만나며 나는 우리 둘 사이를 나누는 차이 같은 건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니,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차이 때문에 연애가 즐거웠으면 더 즐거웠지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외모 차이, 문화 차이, 언어 차이, 성정체성 오픈 정도의 차이. 사실 그런 차이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비슷한 성격과 관심사가 있었고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이 있었다. 생김새니 문화니 언어니 뭐니 그런 것보다 가장 중요한 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같은가였다.
우리 둘 사이에는 사소한 차이점보다 무한한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의 1년 7개월은 무수한 공통점들을 하나둘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불과 1년 반 전, 생김새와 살아온 환경, 채득한 문화, 모국어 등 많은 것이 다른 채로 만났던 우리. 그런 우리가 연인으로 만나 이제는 서로의 문화와 생각을 공유하고 비슷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생경하고 한편으로는 경의롭게도 다가오는 연애 1년 7개월 차. 그 시간 동안 B는 내 상상 속 미래에 서서히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내 것이 될 수 없어 차마 꿈도 꾸지 못한 그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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