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국제 커플이 동거를 준비합니다
* 이 글은 세 달 전, 7월의 어느 날 작성한 글입니다 :)
우리가 사귀는 초반에는 만남의 빈도가 크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평일에는 일을 하는 데다 당시에는 거리도 멀어서 주말에 한 번 만나 하는 몇 시간짜리 데이트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성에 차지는 않았다. 일주일 내내 봐도 부족한데 한 번이라뇨! 당시에는 평일 동안 보고 싶은 마음을 혼자 꾹꾹 눌러 담느라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어느덧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내가 B의 집 30분 거리로 이사하면서 우리는 만남의 횟수를 늘려 갔다. 일주일에 한 번이던 것이 두 번. 그러다 세 번. 또 그러다 네 번. 하루는 내가 B의 집에서 묵고 하루는 B가 우리 집에서 묵고. 그렇게 함께 보내는 시간이 초반보다 몇 배는 더 길어졌다.
또 그렇게 반년을 넘게 보내다 내가 집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이미 일주일에 반 이상을 함께 보내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여러 차례의 길고 긴 대화 끝에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동거를 결정하고서 며칠간은 얼떨떨했다. 동거를 한다고? 내가? 여자 친구랑? 한국도 아니고 영국에서? 비현실이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에서 곧 일어날 예정이었다. 얼떨떨한 감정에 이어 설렘과 기대감도 따라왔다. 앞으로는 버스 정류장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됐다. 밖에서 데이트를 하고 집까지 같이 들어올 수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전날에도 함께 밤을 보낼 수 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따뜻한 집밥을 함께 먹을 사람이 있다. 아아,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그러기도 잠시, 곧이어 불안과 걱정도 찾아왔다. B가 날 너무 자주 봐서 질려하면 어떡하지, 알고 봤더니 라이프 스타일이 서로 안 맞아서 맨날 싸우면 어떡하지. 나의 이런 고충을 털어놓자 B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거 중에 다투지 않을 거라는 장담은 못 하지만, 그래도 이건 장담할 수 있어. 우리는 대화로 풀어갈 거야. 그게 어떤 문제든."
B의 확신에 찬 눈빛과 말투에 나는 그런 걱정을 잠시 접어 구석에 넣어 두기로 했다. 맞다, 동거 후 일은 동거 후 걱정할 일이다. 곧 동거를 맞이하는 지금은 그저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뿐이다.
지난주 평일, 퇴근 후 내가 새롭게 지낼 방을 B와 함께 페인트칠했다. 직접 페인트칠을 하는 일도 처음이라 설렜는데 곧 동거할 여자 친구와 함께 방을 페인트칠하는 일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
우리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에이프릴 라빈의 노래, 디즈니 영화 OST를 노동요로 틀어 놓고 흥얼거리며 페인트칠을 했다. 물론 설레는 마음과는 별개로 직접 페인트칠을 한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어서 패기 있게 시작한 처음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 갔지만, 그럴 때마다 자기도 힘들면서 내색하지 않고 '잘하고 있어', '힘들면 쉬어도 돼', '물 가져다줄게' 하며 힘을 주던 B 덕분에 끝까지 잘 마쳤다.
사실 동거를 결정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선뜻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외부적 사정이 있었고 그 탓에 나와 B는 몇 주 정도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어쩌면 많은 고심과 우여곡절 끝에 결정한 동거라서 이 경험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애인과 동거를 결정했다는 소식에 지인 하나가 이런 조언을 해 줬다.
"하우스메이트 사이의 문제를 연인 사이의 문제로 생각하지 마. 그 두 가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해."
B도 나도 연인과의 동거는 처음이다. 그런 만큼 더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만큼 더 설레는 동거.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도 우리는 그 또한 잘 헤쳐나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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