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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Feb 16. 2024

비행기가 만든 구름

아련한 여름의 기억

"비행기가 날아갈 때 구름을 만들잖아, 비행기를 많이 탔는데 비행기구름이 만들어지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어. 어디서 만들어지는 걸까? 조종사들은 보일까?“


저 멀리 파란 하늘 위로 소리 없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사막이 보고 싶다며 떠났다. 사막은커녕 제주도도 안 가본 나로서는 뉴스로만 보던 그곳에 간다는 그녀가 비행기구름보다도 더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그녀와 연락을 안 하고 지낸지 한참이 지났지만 나는 비행기 구름을 보면 언제나 그 2009년 여름의 나른한 공기가 떠오르며 그때를 추억하곤 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교양수업에서였다. 역사학 개론이었나? 심리학 개론이던가? 80명이 빽빽하게 앉아서 듣던 실학자의 이름을 딴 강의실에서 난 늘 그녀의 뒷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꽈배기 니트 사이로 하얀색 티셔츠를 바라보며 지루한 수업을 들었다.


의자와 테이블이 일체인 일체형 책상에 책을 올리고 읽으려면 책이 몸에서 너무 멀었고 책에 가까이 붙으면 의자가 너무 불편했다.  고등학교 친구에게 했던 장난처럼 샤프심으로 등을 콕 찌르는 상상을 하며 어떻게든 편하게 앉아보려고 애를 썼다.


"반갑습니다. 07학번 엄지은이라고 합니다. 어색하고 좋네요."


조별 과제에서 그녀와 같은 조가 되고 나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코에 주름을 잡으며 혀를 내밀고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아직은 쌀쌀한 4월의 캠퍼스를 걸으며 나는 조별 과제를 핑계로 그녀와 1700원짜리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했고 300원짜리 셔틀버스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올 때까지 버스를 몇 대고 보내곤 했다.


마지막 교양 수업시간에 그녀는 핑크색 스키니진에 반팔 티를 입고 나타났다.


"시험은 잘 봤어? 과제 점수도 좋았고 A+나오겠지?"


그녀가 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시험지를 제출하고 그녀를 따라잡자 그녀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시험도 끝났고 이제 어디가?"

나는 용기를 내서 처음으로 수업과 무관한 질문을 했다.


"글쎄... 나는 이제 이번 학기 수업은 다 끝나서 짐 싸서 본가로 가려고"


"아.. 본가가 어디야?"


"나? 안성 너는?"


"나? 서울 사람이지...? 흐흐..."


"야 자취생 티 다 나거든?"


"나는 충주야 그런데 방학 때는 집에 안 가려고"


"그래? 나는 본가 갔다가 이집트 여행 갈 거야 너무 신난다."


"해외여행이라니 부럽다!"


"응 난 한비야작가 책 너무 재미있게 읽었거든, 남들 다 가는 여행지보다 그렇게 먼 오지를 가보는 게 좋아."


그녀는 신나서 한참을 새로 가는 여행지와 갔다 온 여행지 그리고 앞으로 가고 싶은 여행지 얘기를 했다. 우리는 셔틀버스도 타지 않고 벌써 한산해진 교정을 걸어 내려왔다.


"근데 너 집에 안 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단독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자취촌 빌라숲에 들어섰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봤다.


"아.. 난 집이 이 근처라서.. 넌 어디야?"


"어? 나도 저 앞에 저 빌라야"


그녀가 내가 자취하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엉? 나도 저기 사는데?"


"진짜? 몇 호? 나는 203호야"


"아.. 나는 지하 B101호"


"아.. 반지하 구나 거긴 월세 싸지?"


"응 월세도 싸고 좀 넓은 집에 살고 싶었어"


"완전 잘 됐다. 우리 방학 끝나면 자주 보자!"


건물 입구에서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고 나는 내려가며 작별 인사를 했다. 처음으로 나는 방학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며 여기보다 더 덥다는 이집트의 여름은 어떨지 상상을 했다. 그녀의 싸이 월드에 간간히 코에 주름을 잡고 웃으며 낙타를 타거나, 피라미드에서 팔짝 뛰고 있는 사진을 보며 그녀의 여행을 랜선으로 따라다녔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오빠와 연애를 하는 사진을 올렸다. 멋지게 턱수염을 기른 안 그래도 키가 나만큼 큰 그녀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사람이었다. 이집트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다고 했다. 그래도 그녀는 가끔 집에서 나에게 DVD를 빌려 가거나 식용유를 빌려 주기 위해 연락을 했다. 우리는 계단에서 어색하게 물건들을 주고받았다.


여름이 끝나가는 장마가 오자 내 반지하 집에서는 곰팡이가 피어올랐고 고양이들이 창문가에서 시끄럽게 울었다. 나는 길 높이와 비슷한 창문을 열고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커피를 내리며 곰팡이 냄새를 지우려고 애를 썼다.


[비도 오는데 술 한잔 할래?]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술? 좋지!]


[우리 집 앞에 감자탕집에서 보자]


[그래! 언제?]


[나는 준비 다 됐어 바로 콜?]


[아 나 좀 씻고 30분 뒤에 보자]


곰돌이 감자탕집에 들어가니 그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짧은 팬츠를 입고 쪼리는 벗어 두고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머리도 안 말리고 왔어?"


"응 기다릴까 봐!"


"자 한잔 받아!"


그녀가 나에게 소주잔을 따라 주었다.


"이집트 재미있었어?"


"아... 이집트 재미있었지.."


"싸이월드 사진 다 지웠더라?"


"응.. 나 남자 친구랑 헤어졌거든. 이집트 사진 보면 생각나.."


"아.. 헤어졌구나.."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무엇인가 신이 난 나는 연거푸 잔을 비웠고 만취한 우리는 같이 집으로 들어가 계단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집 앞 현관에 앉아서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나 취업 전에 마지막으로 중동여행을 하려고"


마지막 캔맥주 캔을 찌그러트리며 그녀가 말했다.


"부럽다. 어디 어디 갈 거야?"


"일단은 레바논에서 시작해야지"


"멋지다. 나도 가보고 싶다."


"너도 같이 갈래? 항공권이랑 숙소는 내가 다 알아봤어."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머릿속에서 나는 많은 상상을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여행.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상상. 그리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나..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서 해외를 못 나가.."


"그렇구나.. 그거 보험 들면 된다던데?"


"아.. 부모님 허락도 받아야 되고.."


"그래! 너 집에서 나오는 것도 싫어하는데 무슨 배낭여행이야!"


그녀는 또다시 우리의 빌라를 비우고 여행을 떠났고 취업을 한 뒤에 빌라를 정리하고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갔다. 취업턱을 쏜다고 회사 근처로 놀러 오라고 검은 정장 프사를 한 그녀가 카카오톡으로 말을 건냈다.


도서관 벤치에 앉아 캔맥주 캔을 찌그러트리며 나는 그녀의 프로필을 보이지 않게 숨겼다. 하늘 위로 비행기가 기다란 구름을 만들며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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