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온 딸이 대뜸 하는 말,
“엄마 혹시 원장 선새님이 피아노 대회 얘기 하시면 안 된다고 해야 돼”
“왜?”
“자꾸 나가보자고 하시는데 내가 안 나갈거라고 했거든”
대회는 절대 안 나가겠다는 의지는 피아노를 시작할 때부터였다. 엄마로서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반대할 생각도 애초에 없었지만 왠지 안 나간다고 하는 것보다는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게 덜 무례해 보이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아이에게 말했다.
“너의 마음이 어떤지는 아니까 못 내보낸다고 할게. 그런데 다음에도 원장님이 물어보시면 안 한다고 하지 말고 못 한다고 하는 게 어때?”
“엄마! 못한다와 안한다는 건 뜻이 전혀 달라. 내가 못한다고 하면 연습하면 잘 할 수 있다고 하신단 말이야. 그럼 나는 계속 못한다고 해야잖아. 그런데 안 한다고 하면 잘하든 못하든 대회는 나가기 싫다는 뜻이니까 선생님도 더 이상 안 물어보실거고.”
아이의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니까”
아이와의 대화가 끝나고도 그 여운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못해요’와 ‘안해요’의 차이가 뭘까? ‘못한다’는 것은 능력이나 자격이 안 돼서 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반해 ‘안한다’는 것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다른 이유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일 테고. 그런데 난 왜 ‘안해요’라는 말을 불편하게 여겼던 걸까? 대놓고 거절하는 것처럼 보여서였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은 ‘못해요’도 아니고 “못 할 것 같아요”다. 예의를 차린다고 한 말이지만 생각해보면 참 애매한 말이다. 못한다도 아니고 못할 것 같다니. 이런 대답은 상대에게도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그럼 상대는 ‘어렵지 않아’ ‘다른 사람도 다 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이제까지도 종종 그래왔고) 고민 끝에 결심하고 한 말인데 나의 애매한 표현으로 나는 결국 수긍을 하고 만다. 끝까지 단호할 용기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후회를 하고 이불킥을 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러이러한 이유로 못하겠습니다’라거나 ‘이러한 이유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상대방에게 정확한 의사 전달을 하는 것은 비난받을 행동이 분명 아니다. 오히려 어른다운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도 ‘안해요! 싫어요!’라는 말은 왠지 버릇이 없거나 무례한 언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 요즘 아이들이 대놓고 ‘안해요! 못해요! 싫어요!’를 외치면 ‘요즘 애들’ 운운하면서 혀를 차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나도 그 중 한 명이고)
유교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장유유서를 미덕으로 삼는 동양 문화권에선 자란 세대들은 확실한 의사 표시가 권위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어른을 존경해야한다는 미덕 안에 모든 행동을 제한시켜버렸으니까. 하지만 사회가 변했고 세상도 변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도 이제는 ‘싫은 것은 싫다’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기 표현 하나 똑 부러지게 못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막상 아이가 ‘싫다’고 ‘안된다’고 나오면 버릇없다는 생각부터 불쑥 드는 건 내 안에도 장유유서의 뿌리가 깊은 탓일 것이다.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나의 흑역사들은 대부분 ‘안 하겠다’는 말을 못해서 생긴 것들이다. 단호하게 거절을 못해서 생긴 일들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다. 만만한 게 이불이랄까? 그런 흑역사 중 하나가 피아노 대회다. 피아니스트가 꿈은 아니더라도 피아노 학원을 다니다보면 누구나 콩쿨을 한 번 쯤 나갔거나 나갈 기회가 생긴다. 음악적 재능보다는 남들이 다 나간다는 이유로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 또한 그렇게 대회를 나가게 됐다. 선생님께서 내 또래 아이들과 함께 내 의사는 제대로 묻지도 않고 단체로 등록해버렸던 것 같다.(80년대의 일이다) 피아노를 다니는 6년 동안 남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연주를 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선 대회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알고 보면 ‘우리끼리 재능 잔치’ 같은 것이긴 했지만 명색이 대회이기에 스포트라이트 아래 그랜드 피아노가 위엄을 과시하는 무대와 심사위원들이 있는 엄숙한 자리였다. 대회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후회를 했다. 진즉에 나가기 싫다고 했어야 했는데 왜 그 말을 못했을까? 그 당시는 ‘못할 것 같아요’란 말조차도 못했고, 특히 선생님 같은 권위자에겐 ‘싫다’라는 말을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나였다. 그래서 결국 죽어라 연습을 해서 대회에 나갔고 결과는 망했다. 어린 나이에 무대공포증이라는 트라마우만 남기고 피아노를 그만 두게 된 것이다. 청심환까지 먹고 올라간 무대였지만 피아노 앞에 앉는 내 머릿속은 말 그대로 하얬다. 첫 여덟 마디만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 뒤로는 내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너무 창피해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 뒤로 무대에 서는 걸, 특히나 단독으로 남들 앞에 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됐다. 단체 합창대회에서도 맨 뒷 줄, 맨 끝에 서는대 그래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정도다. 어른이 된 지금도 주목을 받는 자리에선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 무대에서의 첫 경험이 그렇게 대사건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하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했어도 늦지 않았을텐데. 정말 자신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못하겠다고 단호하게 표현해도 됐을텐데. 할 수만 있다면 지우개로 지워 버리고 싶은, 칼로 도려내고 싶은 기억들이 대부분 거절의 표시를 제대로 못해서 생긴 것들이다.
이런 점을 포함해 나만 닮지 않았으면 하는 내 아이가 그 부분에서만큼은 붕어빵 같아서 학교 발표수업이 있으면 며칠 전부터 끙끙 앓는다. 아이 마음을 알기에 ‘그냥 하면 돼’ 라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어서 밤마다 아이 손을 붙들고 기도를 한다. 아이 소원대로라면 그 날을 건너뛰는 것인데 나에겐 시간을 움직일 초능력이 없으니 아이의 마음에 용기라도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발표 수업은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너무 높은 산인 것이다. 하교하고 돌아온 아이의 얼굴을 보면 나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오늘 어땠어? 안 떨렸어?”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아이의 대답은 거의 똑같다.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끝나서 후련해”
아이의 대답에 한 고비를 또 넘겼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쉬지만 이 고비는 매번 찾아올 것을 알기에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도 없다. 그래도 아이는 어른인 나보다도 인생을 빨리 깨친 것 같다. 자신의 영역 밖의 일엔 욕심내지 않고 정말 싫으면 싫다고 표현할 줄 안다. 나도 안 하겠다는 아이에게 이유만 타당하다면 굳이 강요하지 않는다. 나름의 이유는 어쩌면 자신을 지키겠다는 본능적 외침일지 모른다. 그런 애를 굳이 ‘자신감’ 운운하며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유로 아이를 등 떠밀고 싶지 않다. 보편성으로 특수성을 무시한다면 그 또한 폭력일테니까. 내가 이미 그런 삶을 충분히 살아왔기에 나를 쏙 빼닮은 그 아이에게도 잔인한 일일 수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의 보폭에서 지켜봐 주고 본인이 도전할 의사가 생기면 그 때 밀어주고 도와주면 될 것이다.
아이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나도 더 이상 ‘못할 것 같아요’ 같은 애매한 표현 안에서 맴돌지 않고 확실한 의사 표시를 연습해보기로 했다. ‘못해요’가 아니라 ‘안해요’라고 말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