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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쟁이 제이 Sep 11. 2019

어질러짐의 역치와 식기건조대

190908


주말에 모처럼 만난 친구와의 한참의 수다 중 이야기가 자연스레 주부의 영역으로 향했다.


"집안일을 할 게 뭐가 있어?"

"뭐가 있냐니? 끝도 없지!"

"빨래도 매일 할 거 없고, 너는 심지어 식사 준비도 남편이 한다며.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하고 청소는 로봇청소기가 하고."

"아냐. 매일 30분에서 1시간씩은 꼭 집안일인걸?"

"뭘 하는지 구체적으로 얘길 해봐."

"일단 평일을 기준으로 하면-"


평일 기준으로, 아침에 기상하면 제일 먼저 침대 이불을 정리한다. 여름엔 이불을 나 혼자 덮는지라 내 구역, 즉 라지킹 사이즈 침대의 왼쪽 영역에만 이불이 오도록. 잠버릇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베개들과 밤새 만지작댔던 전자기기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안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오면 남편은 이미 출근하고 난 후다. 남편의 흔적이 역력한 주방과 거실에 현기증을 느끼며, 소파 위에 덮어둔 시트와 쿠션들을 바르게 정리한다. 소파 위의 책과 리모컨들도 제자리에 두면 거실은 일단 완료.


다음은 주방이다. 남편이 벗어둔 티셔츠가 식탁 위에 올라와있고, 식기건조대에 그릇들이 가득하다. 얼른 샤워부터 하고 나와 주방 정리를 시작한다. 다 마른 그릇들은 찬장으로, 벗어둔 티셔츠는 옷방으로. 그러고 보니 싱크대에 전날 밤 혹은 아침에 썼을법한 물컵이 나와있네? 싹 설거지해서 다시 식기건조대에  둔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이나 눈에 더 거슬리는 게 있는지 확인하고, 이렇게 집이 정리되고 나면 옷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지금이야 이렇지만 잠시 친정집에 보낸 보리와 율무(키우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돌아오면 사료랑 물, 화장실 갈아주는 것까지 추가. 아참, 나오기 전에 세탁기 예약 설정해두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여기까지 얘기하고나니 친구의 얼굴이 알만하다. 퇴근 후의 집안일까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바쁜 아침에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친구의 말에, 나는 얼마 전에 들은 표현을 빌려 '역치(threshold value, 閾値)'라는 개념을 들었다. 역치를 사전적 의미로 살펴보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이다. 한자어라 낯설게 느껴지지만 문지방 역에 값 치 자를 쓰니, 문턱값 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반응이 나오기 위한 최소한의 자극값인 거다.   

다른 사람들이 그럭저럭 지낼만한 환경에도 종종 혼란함을 느끼는 나는 어질러짐에 대한 역치가 타인보다 낮은 것이다. 반면 "매일 어떻게 그래? 그냥 적당히 하고 한 번씩 도우미 이모님 부르면 되지."라고 하는 친구는 역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일 테고 말이다.


헤어져 집에 돌아와 집안을 훑어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역치. 역치라. 내가 옛날부터 이렇듯 어질러짐의 역치가 낮진 않았는데. 결혼하고 집이 '내 공간'으로 더 와 닿으며 집에 더 욕심이 나고 그림같이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다.


사실 집안일이 힘들진 않다. 오히려 재미있다. 집이 깨끗하고 깔끔 해진다는 건 굉장히 설레는 일이니까. 그런데 집을 깨끗하게 만드는 노동보다는 집이 어질러짐 그 자체가 싫다. 안 어질러졌으면 좋겠다. 호텔룸 들어갔을 때 같이 딱 세팅된 상태, 집이 항상, 특히나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는 더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요즘은 그렇게 집을 메이크업해주는 분도 있다더라." 잠시 솔깃하지만 내 집은 내가 해야 한다는, 그런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생각이 아직까지 내게 있다. 크지도 않은 집, 더군다나 애도 없는 신혼이 도우미를 쓰는 건 아직 아니라고 느껴진다.

"티셔츠를 식탁 위에 벗어두는 건 너무했다. 네가 뭐라 해야지~." 맞는 말이다. 바로 남편에게 얘기했다. 다행히 남편 역시 깨끗한 공간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인지라 이런 건 곧잘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아니, 사실 신혼초만 해도 남편이 나보다 더한 깔끔쟁이였다. 내가 결벽증 아니냐고 할 정도로. 물론 지금은 반대가 되어버렸지만, 남편 역시 어지르는 성격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는 주방을 살펴보는데- 계속 거슬리는 게 있다. 물컵 두 개가 놓여있는 식기건조대. 사실 이미 더할 나위 없이 말끔한 상태다. 그렇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 건,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그릇 더미 때문이다. 설거지 후 물기를 없애기 위해 올려둔 거지만, 아침에 보면 밤새 마른 그 그릇들이 얼른 찬장으로 치워야 할 대상이 된다. 보기 싫은 일거리 더미인 것이다. 이 악순환을 개선할 수 없을까?



몇 주 전인가, 남편한테 이야기했었다. 고정적으로 자리만 차지하는 식기건조대, 치워버리자! 그러면 주방을 좀 더 넓게 쓸 수 있지 않겠냐. 남편은 반대했다. 그럼 그릇은 어디다 말려? 안돼, 건조대는 있어야 해. 우리 부부 특성상 주방 공간은 남편 지분이 크기에 남편의 반대에 바로 포기했다. 그런데 스멀스멀 다시 생각나는 것이다. 치워버릴까? 치울까? 치우자!


"불편하면 다시 갖다 쓰지, 뭐. 버리지 않고 베란다에 고이 잘 둘게. 일단 해보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남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식기건조대 비움을 강행했다. 일단 식기건조대를 들어내니 세상에. 아랫 바닥이 찌든 물때로 끈적끈적하다.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찌든 때를 싹싹 닦아냈다. 하다 보니 옆에 둔 에어프라이어에 튄 기름때와 지저분한 가스레인지가 신경 쓰인다. 이왕 스펀지 든 김에 같이 싹싹. 건조대 뒤에 뒀던 쟁반과 냄비받침들은 주방 서랍 안으로 자리를 찾아 들여보내고, 쓸데없이 가득 찼던 수저통의 수저도 갯수를 줄인다.  물론 수저통 닦는 것도 잊지 않고.


정성 들여 닦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난다. 작은 방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색시야, 고마워~!".  게임 중인 남편이 혼자 일하는 내 눈치를 보며 먼저 날리는 선빵이다. "말만 하지 말고 나와서 한 번 봐봐!". 남편이 얼른 게임을 멈추고 주방으로 나온다. 훠언-해진 주방을 보며 놀란다.


"겨우 그거 하나 치웠는데 되게 넓어 보인다."

"그치? 훨씬 깔끔하지 않아? 주방서 요리하기에도 자리 넓고 좋겠지?"

"응응. 치우니 좋네. 근데 우리 그릇은 어디다 말려?"


설명해준다. 아일랜드 식탁 아래 있는 식기세척기 문을 열고 거기에 말려도 된다. 그렇지만 베스트는 설거지 하자마자 마른행주로 물기를 닦아내서 바로바로 찬장에 넣는 것이다. 그러면 설거지 해서 건조대에 진열하기, 마른 그릇을 정리해 찬장에 넣기, 2단계의 작업을 한큐에 끝낼 수 있다. 그릇이 늘 쌓여있는 주방을 보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설명을 들은 남편이 말한다. "서양식이네." 그렇다. 생각해보니 서양 어느 나란가에선 퐁퐁 푼 물에 그릇 담가 기름기를 빼고 마른행주로 닦아내어 설거지를 마친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철저하게 토종 한국인인 나는 흐르는 물에 헹구기를 포기 못하지만, 여하튼 마른행주로 마무리하는 것도 그리 못할 방법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전엔 스스로도 '정말 건조대 없이 될까?'싶었는데 말이다.


한결 깔끔해진 주방에 남편도 만족하고 나도 뿌듯해서 하염없이 주방을 바라본다. 내 주방. 내 집 주방. 그래, 바로 이거지. 이래야 내 맘에 쏙 드는 내 공간이지.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해시태그는 #미니멀라이프. 이렇듯 사진으로 사람들과 공유하면 정리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또 다른 곳을 더 정리하고 싶은 새로운 동기부여도 되곤 한다. 누가 SNS가 인생의 낭비라 했는가. 이렇듯 순기능도 많은걸. 다 쓰기 나름인 것을.


이튿날 아침, 거실로 나오니 훤한 주방부터 눈에 들어온다. 남편의 벗어둔 티셔츠도 보이지 않는다.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 나온다. 좋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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