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의 이야기
장롱 속 서랍장을 헤집고 서류 가방 속을 뒤집어 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이 모셔두었던 자리에 없다. 어디로 가지는 않았을 텐데 오리무중이다. 가방 속 가장자리지퍼 속에서 겨우 발견했다. 그럼 그렇지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나를 증명하는데 필요한 도장은 오랜 세월 가방한구석 어둠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주인의 필요에 의해 빛을 본 순간이다. 별로 쓸 일이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해 놨다가 필요한 순간 허둥대고 찾았던 기억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 때 투표를 하려고 도장을 찾는데 도장통에 있어야 할 도장이 보이지 않는다. 도장 없이 투표를 할 수는 없고 기권하기는 억울했다. 내 권리를 투표로 반영하고 싶은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 주권행사는 기본 권리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도장을 쏟아놓고 확인하고 있는데 딸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제방으로 가더니 도장을 가지고 나왔다. 고3짜리 딸은 학교에서 부모의 동의를 받을 때 도장이 필요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때마다 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제자리에 갔다 두곤 하다가 나중에는 귀찮은지 아예 가지고 다니면서 썼나 보다. 왜 내 도장을 가지고 다녔냐고 물었더니 필요할 때마다 도장을 쓰려고 지니고 다녔는데 한 번은 담임선생님한테 혼났다고 말했다.
우유급식 신청을 하는데 동기생들이 보호자 도장이 없어 신청을 못 하고 있자 도장을 빌려주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 쓴 거니까 같은 반 우유신청서에 일괄적으로 내 도장으로 찍혀서 나갔다. 담임선생님도 눈여겨보지 않을 거라서 매달 내 도장이 보호자 역할을 대신했다. 문제는 동료들의 대학진학상담신청서에도 내 도장이 보호자의 인장란에 찍혀있는 걸 담임선생님이 발견하고는
“000이 자식이 왜 이리도 많아, 우리 반 학생 어머니는 다 000이야?”
순간 딸은 도장을 남용한 것이 담임선생에게 들통나자 가슴이 철렁했었다.
도장은 신분을 증명하고 권리를 행사하는데 쓰인다. 도장의 쓰임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큰 아들 엘은 후손 없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큰아들의 후손을 위하여 둘째 아들 오난을 큰며느리로 하여금 자식을 얻게 하려고 두 사람이 동침했다. 그 당시에는 형의 대를 이어주는 수혼(㛮婚) 제도가 있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자식을 낳게 하는 씨내리풍습이다. 둘째 아들도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나자 유다는 며느리에게 막내아들이 아직 어리니 막내아들 성장 할 때까지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다. 자식 없는 여인은 결국 거지신세를 면하기 힘든 당시의 풍습 때문에 며느리를 배려하는 유다의 생각이었다. 성인이 된 셀라는 형수와 동침하고 형들처럼 죽을까 두려워서, 막내 셀라가 형수에게 가기를 거부한다. 어차피 아이를 낳아도 법적으로 형의 자식이 되고 가문의 자손을 이어주는 역할뿐이다. 자신에게도 형들처럼 불행이 올까 두려웠다. 막내아들이 자라기만을 기다리던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막내가 성인이 되어도 자기에게 막내아들을 주지 않자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의 대를 이으려고 꾀를 내었다.
유다는 집을 떠나 친구 집에 머물러있었다. 유목민이라는 직업과 떠돌아다니며 가축을 먹이는 지역의 특성상 여러 곳을 다니면서 양을 먹이는 유다는 방랑의 기질도 있었다. 시아버지가 양 떼를 데리고 근방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며느리 다말은 얼굴을 가린 창녀의 복장을 하고 유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앉아있었다. 유다는 집을 떠난 외로움에 원초적인 본능의 욕구를 창녀를 통해 해소하려고 화대를 흥정한다. 여자는 유다에게 무엇을 주려느냐고 하자 유다는 하룻밤의 화대로 염소를 주겠다고 제시한다. 유목민에겐 짐승이 화폐의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다말은 염소를 받을 때까지 약조물로 유다의 몸에 지니고 있는 도장과 지팡이를 달라고 하자 다말에게 도장과 지팡이를 맡기고 다말과 하룻밤을 보낸다. 며느리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체... 다음날 염소를 끌고 가서 도장과 지팡이를 찾으려 했지만 여인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주변사람들에게 여기 있던 창녀 어디 갔냐고 묻자 여기는 창녀가 있는 곳이 아니며 그런 여자가 없다는 대답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불같이 화를 냈다. 행음한 며느리를 끌어내 죽이라고 하자 며느리 다말은 증거물로 도장을 내놓으며 이물건의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했다고 하자 막내아들을 며느리에게 주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자책한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 때마다 필요한 도장이 지금은 거의 쓰지 않고 사인으로 대체한다. 도장보다 안전하고 편하다. 언젠가 은행에 가서 일을 보다가 통장정리 할 때가 있었다. 출납기록 기계에 들어간 통장은 한참 동안 소음공해를 일으키며 드르륵 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창구 여직원이 나를 한번 힐끔 본다. 통장관리를 안 하고 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처럼 이렇게 통장관리 안 하고 산사람도 있냐고 물었더니 어쩌다 한 두 사람 있다고 겸연쩍게 대답한다. 10여 년 가까이 종이통장을 쓰지 않고 있다가 종이통장 네 개를 채우고 나서야 돌아가던 기계가 멈추었다. 도장을 안 가지고 갔기에 인감대신 사인으로 대체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도장을 찍는 행위는 어떤 일의 해결과 완성을 의미할 때 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음으로 일이 성사 됐다는 것을 증명한다. 두 부부가 도장 찍었다고 말하면 혼인이 파탄 났다는 뜻으로 이혼을 의미한다. 또는 눈도장을 찍었다고 말하면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상대에게 신뢰감을 받았다는 뜻으로 말한다. 지금은 특정적인 일 아니면 도장 쓸 일이 거의 없다. 사인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주인의 손을 떠나 가방한쪽에서 인주한번 묻혀보지 못한 인감도장이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으로 나들이를 했다. 오지랖 넓게 한 학급의 보호자 노릇까지 했던 내 인감도장은 이제 겨우 주인을 위해 충성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주인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도장이다. 도장에 새겨진 글자 세자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