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유적지에서는 한정된 시간에 들러야 할 곳과 볼 것이 많아 공부(孔俯)처럼 주마간산 격으로 본 곳이 또 있다. ‘자공여묘처(子貢廬墓處)’였다. 공자 사후 다른 제자들은 3년 상을 치른 후 모두 떠났으나 ‘자공’은 홀로 남아 스승의 묘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을 더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때 기거하던 자공의 움막 터가 이곳이었다. 나는 고속철 출발 시간에 쫓겨 자공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느껴보지 못한 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마음은 뿌듯했다. 함께 여행한 중국인 교수의 설명 덕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공유한 친구들도 고마웠다. ‘곡부’를 방문한 것은 태산을 오른 것보다 훨씬 잘한 일이었다.
‘자공’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처럼 ‘태안’을 간 김에 인근의 ‘곡부’도 들렀다. ‘곡부’는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고향이다. 유교와 동양 사상의 중심지인 이곳에는 공자의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곡부 공 씨의 시조인 공자에 대한 예우였다. ‘곡부’는 ‘태안’ 인근 지역으로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고향이다. 유교와 동양 사상의 중심지인 이곳에는 공자의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곡부 공 씨의 시조인 공자에 대한 예우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양사언’의 작품이다.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 태산이 얼마나 높으면 이렇게 하늘과 비교가 되는지 궁금했다.
중국 산동성 ‘태안’에 위치한 태산은 1,545m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도교의 명산으로 불린다. 중국인들은 천하제일의 산이라고 여겼기에 태산(동), 화산(서), 형산(남), 항산(북), 숭산(중)의 5악 중에서 태산을 으뜸으로 쳤다. 예부터 중국인들은 ‘태산을 보고 나면 다른 악(岳)이 보이지 않는다.’고 예찬하기도 했거니와 1987년에는 역사문화, 미학, 지질학적 가치로 세계 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설악산(1,708m) 보다 낮은 산이 어떻게 오악의 지존이 되었는지 그 산을 직접 올라보기로 했다. 일행은 중국인 교수 두 명과 가족 같이 지내는 내 친구들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태산이 그런 경우였다. 막상 올라보니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관광지였다. 5A급 관광지라는 명성답게 사람으로 넘쳐났고, 산 위의 음식점은 소란스러웠으며, 공용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도교사원이 있었지만 그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질서함에 마음이 불편해 빨리 내려가고 싶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산을 덮어버린 시멘트 포장은 산을 산이 아니게 만들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면 더 오를 곳이 없는 산 닮은 관광지가 있을 뿐이었다.
흙을 밟지 못한 산은 처음이었다. 함께 떠났던 중국인 교수는 걸어 오르는 길도 있다고 했다. 태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무심코 듣고 흘린 소꿉동무 얘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잘 아는 무속인이 태산으로 기도하러 떠났다고 했다. 태산은 기가 센 곳이라 신께 기도드리는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중국인 교수도 얘기했다. 그러니 걸어 오르는 길은 그들의 이동 경로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중국 정부는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시멘트로 산을 덮어버렸고, 이에 부응하듯 매표소 앞에는 표를 사기 위한 여러 갈래의 줄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태산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고, 상상하던 머릿속의 태산은 사라졌다.
태산을 갔는데 그곳에 나의 태산은 없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처럼 ‘태안’을 간 김에 인근의 ‘곡부’도 들렀다. ‘곡부’는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고향이다. 유교와 동양 사상의 중심지인 이곳에는 공자의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곡부 공 씨의 시조인 공자에 대한 예우였다.
공자의 흔적은 크게 공림(孔林), 공묘(孔廟), 공부(孔俯)로 구분돼 있었다. 공자의 묘소가 있는 공림은 세계 최대 규모의 가족묘였다. 수십만 그루의 수목들이 울울창창한 것이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공림으로 짐작하건대, 공자묘는 얼마나 거대하고 멋질까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정말 소박했다. 봉분만 아들 공리(孔鲤)와 손자 공급(孔伋)의 것보다 조금 더 클 뿐이었다. 역시 인(仁)을 설파한 스승다웠다.
공자 유적은 역대 황제들의 관심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공림의 역사적 특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당인 공묘는 중국 3대 고대 건축물 사당 중 한 곳으로 중국 내에서 가장 큰 공자 사당이라고 했다. 나는 공자가 강학하던 행단 앞의 석물에 눈이 많이 갔다. 밤에 횃불을 밝히는 정료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석물의 조각 장식이 정말 정교했다.
대성전에서는 여러 현판 중 특히 ‘생민미유(生民未有)’가 인상적이었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세상사람 중에 공자를 능가할 만큼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공자는 단 한 사람일 뿐 공자와 같은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중국인의 자부심으로 느껴졌다. 대성전을 떠받친 기둥의 조각 장식은 용이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모양이었다. 현란함이 마치 꽃밭을 너울거리는 나비 같았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노벽’이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진시황의 분서를 피해 공자의 많은 책을 벽 속에 숨겨 보호할 생각을 한 것이 감동스러웠다. 공자의 직계 9대 손의 실행이었단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공부(孔俯)는 후손들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공자의 묘소를 보러 갔던 나는 이곳은 별 감흥이 없어 들어가지 않았다. 관심 있는 곳을 좀 더 여유롭게 보고 싶었기에 건물 외관만 바라보고 걸음을 옮겼다.
공자 유적지에서는 한정된 시간에 들러야 할 곳과 볼 것이 많아 공부(孔俯)처럼 주마간산 격으로 본 곳이 또 있다. ‘자공여묘처(子貢廬墓處)’였다. 공자 사후 다른 제자들은 3년 상을 치른 후 모두 떠났으나 ‘자공’은 홀로 남아 스승의 묘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을 더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때 기거하던 자공의 움막 터가 이곳이었다. 나는 고속철 출발 시간에 쫓겨 자공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느껴보지 못한 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마음은 뿌듯했다. 함께 여행한 중국인 교수의 설명 덕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공유한 친구들도 고마웠다. ‘곡부’를 방문한 것은 태산을 오른 것보다 훨씬 잘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