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람 Mar 02. 2024

나의 수호자, 라푼젤 언니와 제니퍼

- 걷기 32일 차 -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꽤 긴 30.5km인데 발목 컨디션은 어제보다 나쁘다. 아침 7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드랜턴 불빛으로 벗겨내며 첫발을 내딛는 순간, 으윽!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신호가 번개보다 빠르게 뇌리에 꽂힌다. 머리칼이 곤두섰다. 정신이 퍼뜩 든다. 스틱과 오른발에 힘을 실으며 조심조심 걷는다.    

  

내가 걷는 가까이에는 항상 라푼젤 언니가 있다. 언제부턴가 이 언니는 수호자처럼 내 가까이에서 걸으며 나를 살핀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잰걸음일 수밖에 없는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었고, 아파하면 걷던 길가 아무 데나 앉아 쉬게 했다. 이런 사람을 길동무로 두었으니 내게는 여간한 복이 아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못했으나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철들면서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은 지금까지 평생 이어졌다. 사회에서의 호칭은 언제나 공적 직급에 따른 것이었고 애매하면 선생님이었다. 그렇기에 이 길에서도 만나는 한국 사람은 누구나 쌤이란 호칭으로 통용되었다. 그런 내가 언니라 부르며 의지하는 길동무가 생겼으니 그녀가 바로 '라푼젤 언니'이다.       


애니메이션 속 라푼젤과 나의 언니 라푼젤은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화 속 라푼젤은 마법의 꽃 영향을 받은 긴 금발이나, 라푼젤 언니는 손질이 잘돼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이다. 내 눈에는 언니가 아무 도구 없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쓱쓱 빗어 올리면 깔끔한 올림머리가 되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다. 한 번도 긴 머리를 해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다.

      

라푼젤 언니와 함께 숲길을 지나는 중이었다. 한 여성이 맞은편에서 나타났는데 세상에나! 제니퍼가 아닌가. 이 길 위에선 누구나 그녀를 ‘까미노 천사’라 부른다. 스페인에 살면서 까미노길이 좋아 늘 길 위에 머무는 사람, 내 아픈 다리가 안쓰러워 도움을 주려고 항상 마음 써주는 사람이 그녀였다. 우리가 오늘 이곳을 지날 것 같아 숲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녀는 담담하게 다가왔지만 내게는 기적 같은 일로 여겨졌다.   

   

반가움에 눈물이 터졌다. 제니퍼를 다시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까미노 길에서 협찬 인생을 살고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이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특히 제니퍼의 도움은 현실이었다. 말이 안 통하는 나하고 함께 약국과 병원을 동행했고, 얼음찜질을 할 수 있도록 얼음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와 눈물로 헤어졌는데 다시 만났으니 어찌 눈물이 안 나오겠는가.  

    

마음이 즐거우니 아픈 다리가 갑자기 좋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웃음이 헤퍼지고 발걸음이 가볍다. 이틀 후에는 이 길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를 밟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잘 걸을 것 같은 이 기분은 제니퍼가 몰고 온 나비효과이다.      



오늘의 목적지 '아르수아'의 알베르게를 향해 까미노 천사 제니퍼와 라푼젤 언니와 함께 걸었다. 내가 그들과 걸음 보폭을 맞추며 걸을 수 있다는 게 마냥 기뻤다. 마음이 가벼우니 발걸음도 가볍다. 평화로운 숲 속을 걸을 때도, 아름다운 냇가를 지날 때도 웃음을 하늘로 날렸다. 행복한 마음은 이들과 걸으며 들렀던 성당이 문만 열어줬더라면 아마 최고치에 이르렀을 것이다.      


작고 소박한 마을 ‘푸로레스’를 지날 때였다. 이 마을에는 한 손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계시다고 제니퍼가 알려주었다. ‘멜리데 십자가’였다. 어찌 안 보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푸레로스 산 쥬앙 성당(Igrexa de San xoan de Furelos)’을 찾아갔다. 세상에 딱 두 개뿐이라는 이 십자가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 오래전에 십자가 아래에서 한 신자가 진심으로 뉘우친 뒤 고해소에 들어가 자신의 모든 죄를 신부님께 눈물로 고백했다. 그러자 사제는 사죄경을 들려주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를 했단다. 그 후 그는 열심히 살았다. 죄를 짓지 않으려 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신자는 매번 같은 죄를 지었고 사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는 또 같은 죄를 고하는 이 신자의 뉘우침에서 진정성이 의심되어 용서를 거부했다. 그러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오른손을 못에서 빼내 그 신자에게 십자가를 그어주면서 사제에게 말씀하셨다.


“그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은 그대가 아니다.” >     


멜리데 십자가는 이 마을 출신의 조각가 '마누엘 카이데(Manuel Cajide)의 작품이란다. 지친 순례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이라는데 아무리 서성거려도 성당 안으로 안내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없다. 몹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이번에도 셀프 위로를 한다. 작은 마을이니 성당에 관리자가 없는 거라고.

때를 같이 해,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비를 뿌린다. 아쉬워하는 내 마음이 하늘에 닿았나 보다.    

   

* 걷기 32일 차 (빨라스 데 레이~ 아르수아(Arzua)) 30km / 누적거리 759.5km     

작가의 이전글 내 발목에는 골칫덩이가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